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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Mar 19. 2022

귀거래사

10년전에 귀거래서를 썼었다. 이랬으면 결심을 지켜야 했는데,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또 교육 운동판을 기웃거리다 환멸만 하나 가득 안게 되었다. 이제 10년전의 글을 개작한다.이제는 진짜.


돌아가리라! 서재가 황폐해지고, 아이들이 나를 찾으니 어떻게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미 마음을 잡고 연구하고 저술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으니 어찌 실심하여 홀로 슬퍼하고만 있으리요?

이미 지난 일은 바로잡을 수 없지만, 장차 오는 일은 내 따를 수 있으리라.

내 엉뚱한 사람들을 위해 힘을 쓴 바 되었으나, 그래도 이제나마 참으로 길을 알겠노라.

머렐 밑창은 또각대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옷깃을 흩날리도다.

이윽고 내 책장이 눈에 들어와 기뻐서 뛰어가노니, 베버가 반갑게 맞이하고 플라톤이 문 앞에서 기다리는도다. 쓰다 만 교육철학 고전 해제는 황폐해져 쓰던 나도 내용을 모를 지경이 되었지만, 마르크스 독본은 오히려 예와 같구나.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을 손에 들고 컴퓨터를 열어보니 "온택트 시대의 미래상식" 문서가 화면 한 가득 떠 오르니, 진한 커피를 가져와 혼자서 잔질하다가 뜨락의 나뭇가지를 보고 웃음을 머금는다. 남쪽 창에 기대어 오만함을 부치니 손바닥이나 겨우 펼 키보드가 오히려 편안함을 알겠도다.

매일같이 공원을 거니는 것으로 취미를 삼고, 거닐다가 쉬다가 가끔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보니 구름은 무심히 산등성이에서 피어 오르고,새는 날기에 지치면 돌아올 줄을 아는구나. 햇빛은 가물가물 막 어두워지려 하는데 외로이 선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대도다.

돌아가리라! 사귐을 그만두고 교유(交游)를 끊어야지.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으니 다시금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리요? 사랑하는 이와 정담을 기뻐하고 음악과 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녹이노라. 카톡 프로필이 앞으로 800여일 남았다 일러 주니 이제부터 교실 떠날 날을 헤아리며 마지막 아이들을 귀엽게 바라본다.

삼각형 스트라이다를 타고, 혹은 15리를 걸어서 넓은 공원, 긴 시내를 건너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즐거운 듯 꽃이 피려 하고 내 머리에서 비로소 졸졸졸 샘물이 흘러내린 시절도 있었지만 그냥 간직하리라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만두어라. 몸뚱이를 우주 안에 붙여 둠이 다시 몇 때나 되겠는가. 어찌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 두고 머무는 대로 맡기지 않고 어찌하여 서둘러 어디로 가고자 한단 말인가.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 아니며 나라일이야 알아서 제 길을 갈 것이니 여한이 없도다.

좋은 시절 생각하며 외로이 걷기도 하고, 혹은 에어팟 볼륨을 최대로 올려 모차르트를 듣노라.

동교동 출판사에 가서는 청소년 책을 내고, 서교동 출판사에 가서는 소설을 내노라. 내 자유로운 정신과 지성의 흐름에 몸을 맡기노니 무릇 천명을 즐기되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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