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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Sep 19. 2018

건축 출판사 대표 이병기의 상도동

마당이 있는 집

건축 출판사 ‘아키트윈스’를 운영하는 이병기 대표의 기억 속 첫 집은 상도동의 골목 끝집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마당이 있는 그 집에서 병아리와 고양이, 강아지를 키우며 뛰어놀았다. 두 딸의 아빠가 된 지금은 아이들에게 자연을 접할 기회를 주기위해 광진구 중곡동에 터를 잡았다. 마당에 풀과 꽃을 심으며, 아이들에게 그 집이 자신의 상도동 골목 끝집처럼 생기 가득한 집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내 인생 첫 집, 상도동 골목 끝집


요즘에야 ‘너희 부모님은 어디 분이시니?’라고 묻는 일이 흔치 않지만, 나의 부모님은 일거리를 찾아 전국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시절의 사람이다. 전북 임실에서 상경한 두 분은 동작구 상도동에 처음 정착했다. 삼남매 중 누나들은 임실에서,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니, 나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진짜 서울 토박이인 셈이다. 동네에서 한 번 이사를 했다고 들었는데 너무 어릴 때라 태어난 집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이사하여 초등학교 2학년까지 살았던 ‘언덕배기 골목 끝집’, 대추나무와 꽃사과나무가 있던 집이 내가 기억하는 ‘인생 첫 집’이다.

원고를 쓰면서 혹시 아직도 있을까 싶어 지도를 찾아봤다. 주소를 외우지 못하지만 기억 속 몇몇 장소들을 따라 지도를 훑어봤다. 성대시장, (지금은 강현중학교로 이름이 바뀐) 강남여중, 동네 공터, 2학년까지 다닌 상도초등학교…. 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위성지도에서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니 뭉클했다.

어렸을 적 동네 미용실은 초등학생 머리를 자르는 데 1,000원을 받았다. 작은누나는 자기가 가위로 손질해줄 테니 그 돈으로 짜장면을 사먹자고 제안했다. 당시 성대시장 건너편에 있던 중국집은 짜장면 값이 700원이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시장과 중국집이었다. 그 옆으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빈집 자리도 찾았다. 거실이 2층 높이로 열리고 샹들리에가 달린 부잣집이었는데, 오랫동안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는 듯했다. 골목 어귀에 있던 구멍가게, 그 오르막과 언젠가 화재로 불타 역한 냄새가 나던 모퉁이 집과 그 앞 전봇대. 골목대장 복수 형네, 아랫집 정현이네, 옆집 성준이네까지 차례로 떠올랐다. 지도를 따라 장소들을 찾아내자 여러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나의 실타래처럼 기억과 장소가 연결되어 있던 까닭이다.




생기가 넘치는 마당에서


마당은 온갖 살아 있는 것들로 가득했다. 한 번은 큰누나가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샀는데, 혼자 여러 마리를 사왔다고 하면 혼날 것 같았는지 삼남매가 하나씩 산 것으로 하자고 꼬드겼다.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는 금방 죽는다는 속설과는 달리, 신기하게도 병아리들은 모두 건강히 자라 닭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고 하루 종일 마당을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던 녀석들은 어느 날 우리 저녁상에 오르고 말았다. 우울한 삼남매를 안쓰럽게 여긴 부모님은 마리당 5,000원씩 값을 후하게 쳐주셨고, 그 길로 우리는 성대시장에 나가 좌판 상자 안에 있던 고양이 한 마리를 골라왔다. 이제 마당의 주인은 고양이로 바뀌었다. 고양이가 자라 난리를 피자 나중엔 부모님 몰래 그 녀석을 이웃집에 팔아 다시 그 돈으로 강아지를 사왔다. 우리는 마당 한편의 연탄광 앞에 개집을 만들어주었다. ‘복슬이’라 이름 붙인 강아지는 이후 마당에서 뛰고, 뒹굴며 우리와 함께 자랐다. 300원으로 시작된 애완동물 릴레이는 유년 시절 첫 집과 그 마당에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1988년, 올림픽선수촌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난생처음 아파트에 살게 되었는데, 사람들 말이 아파트에서는 닭도 고양이도 개도 키울 수 없다고 했다. 상도동 시대는 복슬이의 새끼 ‘누룽지’를 한 동네 살던 아버지의 고향 친구 분께 맡기며 막을 내렸다.




골목 끝집에서 모과나무집으로

10년간의 스페인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아내와 딸둘, 나까지 네 식구가 살 곳을 정해야 했다. 아파트에서 초·중·고, 대학까지 졸업한 ‘아파트 키드’였지만 출퇴근을 하지 않는 내게 아파트는 그다지 좋은 유형의 집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자연을 접할 기회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결국 산과 강, 공원이 가까운 광진구 중곡동, 40년 된 2층집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대문 옆에 커다란 모과나무가 있어 동네사람들은 이 집을 ‘모과나무집’이라고 부른다. 사실 전 주인이 가지를 모두 잘라버려서 처음엔 나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람 사는 집에는 살아 있는 것들이 주는 ‘생기’가 있어야 한다. 혼자서 곡괭이를 들어 마당의 시멘트 바닥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풀과 꽃을 심었다. 이제 2년이 지나 마당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모과나무에도 여린 가지들이 자라나서 이제야 조금씩 나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 집이 상도동 ‘골목 끝집’처럼 생기 넘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글·사진 제공 이병기 아키트윈스 대표, <가우디의 마지막 주택: 밀라 주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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