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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Jan 07. 2022

피어싱 일기

#3. 살아있는 것 같아서

와 얼음 마취는 최고다.
그럴 일이 얼마나 있겠냐만, 누군가 나에게 살면서 해 본 가장 신기한 경험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얼음 마취라고 할 정도다. 전신마취, 수면마취, 하반신 마취, 잇몸 마취까지 참으로 다양한 마취를 경험해봤지만 -이렇게 쓰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 얼음처럼 뒤끝 없고 깔끔한 마취는 처음이었다. 좀 차갑긴 하지만.
'아이 차가워. 언제 시작하려나?'


"다 끝났어요~"
"잉? 벌써요?"

오늘 귓바퀴 연골 두 개를 나란히 뚫을 예정이었다. 시술을 시작하기 전, 얼음 마취는 빨리 풀리기 때문에 두 번째로 뚫는 곳은 좀 따가울 거라고 주의를 들었었다. 나름 용기를 내 보기는 했으나 졸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뚫는 줄도 모르게 뽁뽁 뚫고 나니 어찌나 신기하던지. 조금 고민하다가 아까 고른 피어싱이 세 개라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무리수를 둬 보기로 했다.

"저기... 저 하나 더 뚫어도 돼요?"


얼음 마취를 다시 했던가 안 했던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내 귀에는 귓바퀴에 두 개, 보통 귀 끝점이라고 부르는 귓불의 위쪽 같기도 하고 귓바퀴의 아래쪽 같기도 한 위치까지 총 3개의 새 피어싱이 반짝였다. 끝까지 나를 친구라고 불러주지는 않으셨지만, 솜씨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던 사장님께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가게를 나서자마자 약국이 보인다. 뭘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마이노신과 에스로반 연고를 건넨다. 대기 좌석에 일자로 앉아 쪼르륵 귀를 뚫는 모습부터 약국까지 컨베이어 벨트가 따로 없다. 마치 자동화 시스템 같은 모습이 좀 귀엽게 느껴져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산선수 / 룩 피어싱 아픈가요? (출처_ 네이버 검색)

도쿄 올림픽 양궁 종목에서 3관왕을 달성한 안산 선수의 룩 피어싱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룩은 귀 중상단의 접혀있는 연골 부위로 뼈가 두꺼워서 뚫을 때의 고통도 강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에도 '룩 아픈가요?'라는 질문이 꽤 많이 보였다. 아무래도 피어싱을 해 보지 않은 분들께서는 뚫는 고통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는 피어싱을 뚫는 고통보다는 뚫고 나서의 관리가 더욱 까다롭고 골치 아픈데도 말이다.

물론 이렇게 잘난 듯이 말하는 나도 다음에 뚫을 심산으로 '룩 아픈가요'를 검색했다는 것은 우리끼리의 비밀이다.


연골에 피어싱을 하면 보통 3일 정도 소염제를 먹어야 한다. 그러면 며칠 머리 감을 때나 빗을 때 조심하다 보면 점점 괜찮아진다. 회복에는 최소 한 달, 완전히 아물기까지는 6개월 정도는 걸린다. 그러나 도중에 고름과 진물로 한참 고생할 수도 있다. 심한 경우 힘들게 뚫은 피어싱을 빼 버려야 한다. 나처럼 한 번에 한쪽 귀를 여러 개 뚫는 것은 가능하지만, 양쪽 귀를 뚫는 것도 추천하지는 않는다. 귀를 뚫은 방향으로 뒤척이면 상처가 덧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고 불편하게 뭐하러 그런 것을 하려고?


딸의 피어싱 계획에 부모님은 썩 못마땅하신 모양이다. 그러게. 아프고, 관리도 까다로운데 멀쩡한 귀에 구멍을 왜 뚫는 것일까. 누군가는 피어싱을 뚫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피어싱이 예뻐서 주기적으로 뚫는다고 한다. **존 등으로 유행해서, 동경하는 연예인을 따라서 뚫는 사람도 많이 있다. 나의 경우, 여러 가지 이유가 짬뽕되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랜만에 자극이 필요했던 것 같다.


비교적 큰 병을 앓고부터는 언제나 삶과 죽음 사이에 아주 작은 경계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한 생각은 나를 허무주의에 빠트렸다. 무언가 관심사가 생겨도 '환자가 무슨'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정리한 것이 여러 번이다. 대신 시시각각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고 삶에 초연할 수 있게 해 주었기에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짐작컨데 일종의 방어기제 였을 것이다.


안다. 내가 아프던 말던, 안 죽는 인간이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앞으로는 되도록 삶과 죽음을 분리하고 삶을 우선시 해 보려고 한다. 34살 부터는 나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을 '어차피 끝이 정해진 허무한 것' 따위로 치부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랜 기간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준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그보다 훨씬 힘들게 암의 완치 판정을 받아낸 이상 이제부터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마음'으로 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오랫동안 미루었던 피어싱을 한 것도 그래서 였을 것이다. 귀걸이 따위에 너무 큰 의미부여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기쁨과 슬픔, 고통과 편안함을 느끼고, 때로는 자극을 좇으며, 후회가 남지 않도록 즐거운 마음으로, 사람답게) 살고 싶다.





한겨울의 차가운 바람 덕분에 집에 올 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따뜻한 집에 들어오니 얼었던 귀가 녹으면서 뻐근한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맥박이 귀로 느껴질 정도였다. 조용한 방에서 통증에 귀를 기울여본다. 문득 옛 연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들어본 날이 떠올랐다. 이번이 그때보다 더 크고 생생한 소리다. 호흡을 할 때마다 주기적으로 귀를 콕 콕 자극해오는 맥박이, 아프지만 썩 싫지가 않다. 마치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매 순간 확인시켜주는 것만 같다. 게다가 볼수록 예쁘다. 이렇게나 귀엽게 반짝이는 생(生)의 증거 또 어디에 있을까!


사실은 저거 다 핑계고, 국 이 말을 하고 싶어 글을 쓴다.

예쁜 새 피어싱 만세!


글을 마치며

글의 열렬한 지지자인 어머니께서는 이 글에 만큼은 좋아요를 누르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피어싱이라는 주제가 싫기 때문이란다. 어떡하죠 엄마, 저 이거 다 아물면 다음엔 오른쪽 뚫고 올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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