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으는돌고래 May 30. 2018

가장 빛나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Stand By

영화 <스탠바이, 웬디>를 보고

* 브런치 무비패스로 관람한 영화입니다. 본 리뷰는 영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수소 덩어리가 천만 도에 이르면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면서 아기별이 탄생한다. 짧게는 천만년 길게는 백억 년도 살다가 마지막 순간이 오면 엄청난 빛을 발산하며 폭발한다. 오직 가장 빛나는 순간을 위해 일생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것이다.



그녀의 우주


과학자들의 전폭적인 헌신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자폐를 앓고 있는 웬디(다코타 패닝 역)에게는 발 딛는 모든 곳이 우주다. 그만큼 세상 모든 자극을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보통은 어른이 되며 필터를 장착한다. 그 덕에 사람 많은 음식점에서도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웬디는 주변 모든 것에 반응한다. 평범한 어른 중 신호등 앞에 서서 ‘빨간불일 때는 멈춰. 초록불이다. 이제 손을 들고 건너’라고 주문을 외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사람 많은 곳에서 넋 나가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거다. 두 사람만 양쪽 귀에 속삭여도 정신 사납다. 심리학 수업시간에 조현병을 체험해보는 액티비티가 있었다. 대여섯 명이 그룹을 지어 번갈아 가며 한 사람을 둘러싸고 동시에 각자 떠드는 식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토하고 싶을 정도로 어지러워졌다. 그러다 이내 혼이 나간 것처럼 아득해졌는데, 순간 ‘아, 우주에 있으면 이런 기분일까’ 상상했었다. 요일별 옷차림, 시간별 스케줄, 그리고 마켓가는 절대 건너지 않는다는 행동제약까지. 웬디에게 그토록 많은 규칙이 필요한 건 우리는 느껴볼 수 없는 그녀의 우주를 무사히 유영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숨이 가빠오는 순간마다, Please Stand By


<스탠바이, 웬디 (Please Stand By)>는 웬디의 일탈을 그렸다. 웬디는 스타트랙 광팬이다. 작품의 아주 작은 요소까지 줄줄 꿰고 있는 게 '스타트랙 위키피디아' 수준이다. 그녀는 파라마운트 시나리오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 450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쓴다. 언니와의 만남이 틀어지면서 시나리오 마감일을 놓칠 위기에 처하자 웬디는 직접 LA에 있는 파라마운트 본사에 찾아가기로 한다. 한번도 건넌 적 없었던 마켓가를 건너기로 한 것이다.


LA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다. 강아지가 실례하는 바람에 버스에서 쫓겨나고, 길가에서 만난 여자에게 소매치기를 당한다. 겨우 LA로 향하는 밴을 얻어탔지만 그마저도 사고가 나서 병상에 눕게 된다. 숨이 가빠오는 순간마다 웬디는 혼잣말로 자신을 달랜다. "Please stand by. Please, please stand by."

우여곡절 끝에 시나리오를 제출했고 보고 싶었던 조카도 만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항해 중이다. 자폐는 낫지 않았고 예전처럼 루틴대로 살며 수시로 '스탠바이'한다. 그 끝이 어딘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별의 목적지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급함에 지지 않길


기다림은 어렵다. 의연한 사람도 조급하게 하고, 가끔은 그래서 일을 그르치게 한다. 20대에는 다가오는 모든 기회에 조바심을 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못할 것 같아서, 이 기회를 놓치면 생존 전쟁에서 도태될 것 같아서, 다시는 어떤 기회도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앞뒤 재지 않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던 것 같다. 조급함에 떠밀려 살았던 것 치고는 꽤 많은 것들을 얻었지만, 그중 가장 큰 성과는 '조급함에 지지 않을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될 일도 안 된다. 제대로 빛날 방법은 실력을 쌓는 것뿐이다.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기웃거릴 필요도 없고, 떨어지지 않을 콩고물을 기대하며 괜한 사람에게 비비적댈 필요도 없다 (물론 모든 만남에 예를 갖추는 건 중요하다). 실력 있고 예의 있는 사람을 마다할 파트너는 아무도 없다. 관건은 성장기의 조급함을 이겨내고 그 시간을 의연하게 견뎌낼 수 있냐는 것이다.

웬디를 대신해 조급함에 여기저기 치이고 있을, 성장통을 겪고 있을 동지들에게 응원을 전한다. 가장 빛나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Please stand by.



매거진의 이전글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곳, ‘리틀 포레스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