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날돌이, 첫 번째 이야기
울릉도 바다, 거기에 용기가 있었다. 머리에 돌고래 꼬리 모양의 반점이 있는 문어였다.
'문어가 사람을 안내하다니, 신기한 세상이야.'
용기는 어리둥절한 날돌이 앞에서 여덟 개나 되는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빙글, 빙글, 빙글 돌았다. 다리를 쭉 펼친 용기는 쉬폰 스커트를 걸친 소년 같았다. 치맛자락을 몇 번 살랑이더니 우아하게 물살을 치고 나갔다. 머리 위의 돌고래 꼬리가 빛나고 있었다.
'그래, 바닷속은 사람보다 문어가 더 잘 알겠지.'
날돌이도 그 뒤를 따랐다. 육지에서는 그렇게 무겁던 공기통과 부력조절기가 물속에서는 제법 가벼워졌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니 작은 물고기들이 알록달록한 산호 사이로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새로운 행성을 만난 것 같았다. 온 사방이 티 없이 파란 세상이었다. 얼마나 파란지 불 꺼진 방에서 갑자기 휴대폰 화면을 본 것처럼 눈이 시렸다. 앞서가던 용기가 속도를 조금 늦춰 날돌이와 나란히 헤엄쳤다. 고개를 돌려 다시 용기를 봤을 때, 날돌이는 '이 파란 행성이 어쩌면 용기를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절제된 몸짓에서 용기의 배려와 여유와 위트가 느껴졌다. 행여 방해가 될까봐 날돌이는 용기에게서 한 뼘 정도 떨어졌다. 그때였다. 잔잔했던 바다에 갑자기 거센 물살이 일었다.
작은 생물들은 혼비백산하여 근처 바위에 몸을 숨기기 바빴다. 정갈하기 이를 데 없던 용기의 몸짓도 흐트러져버렸다. 용기는 날돌이를 뒤로한 채 나폴거리는 해조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행성 어디에도 날돌이가 몸을 숨길 곳은 없었다.
물살은 잦아들었지만 날돌이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저 고요 속에서 용기의 돌고래 꼬리 반점이 빛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단풍을 닮은 해조 틈에 퍼져버린 용기를 향해 날돌이가 손을 뻗었다. 용기의 다섯 번째 다리에 손가락이 닿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여섯 번째 다리, 두 번째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초조해진 날돌이의 시선이 돌고래 꼬리 반점에 멈췄다. 조심스럽게 돌고래 꼬리를 어루만졌지만 이번에도 반응이 없었다. 용기는 앞으로 영영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날돌이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여기서 아는 생물은 용기뿐이었다. 용기가 사라진다는 건 날돌이가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진다는 뜻이었다.
'문어도 심폐 소생을 할 수가 있나.'
날돌이는 어떻게든 용기를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의 심장이 어디 달려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공기통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물결에 따라 춤을 추는 해조가 날돌이의 팔을 간지럽혔다. 잠수복을 입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도 날돌이는 용기를 놓지 않았다. 해조가 춤을 추든 말든 한 손으로는 용기의 몸을 잡고 반대편 손으로는 돌고래 꼬리 반점을 찾았다. 용기가 해조에 가려질 때면 커다란 얼굴을 조금씩 해조 사이로 들이밀었다.
공기통을 들쳐 맨 날돌이의 몸이 돌덩이처럼 부유했다. 그 모습이 꼭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성에 불시착한 외계인 같았다. 돌고래 꼬리 반점은 용기의 머리에 비해 너무 작아서 날돌이는 애를 먹고 있었다.
'용기야, 잠들지 마. 내가 다시 뭍으로 돌아갈 수 있게, 나를 좀 도와줘.'
간절한 마음으로 돌고래 꼬리를 문질러보고 눌러보고 톡톡 두드려봤다. 순식간에 10분이 흘렀다. 어찌나 집중을 했는지 뒤에서 상어가 입을 벌리고 나타나도 몰랐을 것이다.
눈치 없는 줄돔 무리가 용기 주위로 몰려들어 날돌이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날돌이는 물고기를 가만히 있게 할 방법을 몰랐고 줄돔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날돌이는 점점 지쳐갔다. 괜히 숨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해조가 크게 한 번 몸을 흔들자 '미끄덩', 용기가 사라졌다.
손목에 찬 다이빙 컴퓨터가 계속 깜박거렸다. 무감압한계시간이 1분 밖에 남지 않았다. 날돌이는 이제 혼자라도 올라가야만 한다.
'물 밖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지금 어디쯤 와있는 거지?'
늘 충분한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만, 정답을 몰라도 움직여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날돌이는 천천히 수면을 향해 상승했다. 잠수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일단은 나가야 하니까.
그런 날돌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란 행성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일간 날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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