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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Jun 02. 2021

『클라라와 태양』을 읽었다

결정만큼 아름다운 일이 있나 싶네요.


과거 종교 철학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현대인들은 과학과 논리가 많은 걸 설명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렇진 않아요. 여전히 우리는 정의, 평화, 사랑 따위의 개념을 믿습니다. 이건 과학의 영역이에요, 아니면 종교의 영역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도 믿음의 시대에 사는 중입니다.” 철학과에서 들었던 교수님들의 얘기 중, 여전히 곱씹는 말 중 하나다. 나는 교수님의 이 말이, 인간 안에 내재한 이율배반적인 면모를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여러 명제를 증명하며 이율 배반 개념을 설명한다. 간단하게 두 명제를 예시로 들겠다.


정립 : 세계에는 그것의 부분으로서든 그것의 원인으로서든 단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인 어떤 것이 있다.


반정립 : 단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는 세계 안에든 세계 밖에든 어디에도 그것의 원인으로서 실존하지 않는다.


『순수 이성 비판 2』,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아카넷, p.664-665


이 명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두 명제는 동시에 참이면서도 거짓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철학적인 주제에 관심 있는 이들이 흔히 얘기하는 신의 존재 증명이나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에 관한 얘기는 어쩌면 시간 낭비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한, 혹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바에 따라 두 명제를 번갈아 선택한다.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믿고 싶을 땐, 영원함과 사랑의 가능성을 옹호하고, 세상은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고 싶을 땐, 논리를 옹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다채로운 색을 가진다. 어떤 때는 논리적이었다가도, 어떤 때는 신의 존재를 열렬히 믿으며, 제발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런 모습의 연속이 지금의 인간을 만든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얘기를 보고 줏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줏대라는 것조차 인간이 만든 이념 혹은 사념이니, 그런 얘기는 무의미하지 않을까.

우리는 평화, 사랑, 공정, 정의 등의 가치를 믿으면서도 논리적으로 살아간다. 재밌는 점은, 논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그것이 무너질 수도 있고, 때로는 잘못된 걸 알면서도 믿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설령 잘못된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순간은 아름답고 가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이 내린 결정이니까.




클라라, 그리고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는 『남아 있는 나날』의 제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의 경우에는, 한 작가 친구가 언급한 ‘낮의 잔재’라는 프로이트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을 깨어 있는 동안, 곧 낮 동안의 사유 활동과 연관시켜 의미를 부여했다. 이 ‘주간 잔재(day residue)’라는 개념이 분위기상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본 이시구로는 이를 조금 변형시켜 자신의 작품에 ‘The Remains of the Day’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런데 이 ‘낮’이란 하루의 한 부분인 동시에 인간의 활동 기간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송은경 옮김, 민음사, p.309-310


『클라라와 태양』에서 태양은 단순히 하늘 위에 있는 항성을 의미하진 않는다. 작품에 등장하는 AF(Artifical Friend)에게 자양분(에너지)을 주기도 하고, 클라라에게는 일종의 종교였다. 클라라에게 태양이 종교가 된 계기는 쿠팅스 머신의 등장과 거지 아저씨의 부활(?) 때문이다. 작품 초반에 쿠팅스 머신의 공해 때문에 클라라는 자신의 몸이 약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낮인데도 밖이 거의 한밤처럼 캄캄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연기를 내뿜었으니 클라라가 자양분을 충분히 받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쿠팅스 머신이 사라진 다음에야 클라라의 눈에는 눈부신 하늘과 태양이 보였다(p.50-51).

거지 아저씨와 개 얘기는 다음과 같다. 클라라가 창가에서 밖을 보는 사이, 거지 아저씨와 개는 문간에 바싹 붙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클라라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다음 날, 해가 거리와 건물 안에 자양분을 쏟아부었고, 거지 아저씨와 개의 자세가 바뀐 걸 보고 클라라는 ‘해의 특별한 자양분이 그들을 구한 것이다(p.63).’라고 생각하게 된다. 두 사건으로 인해 클라라에게 태양은 생명의 근원이 된다. 그러니 클라라에게는 다음과 같은 궁금증이 따라온다. 태양은 어디로 향하는가? 클라라의 궁금증은 조시와의 대화를 통해 해결된다.

조시가 클라라와 처음 가게에서 만난 날 클라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 서 있는 자리에서는 해가 저 큰 건물 너머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그렇지? 그러니까 해가 정말로 어디로 내려가는지는 안 보일 거야·…(중략) 우리 사는 데는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고. 내 방에서 보면 해가 내려가는 정확한 지점을 볼 수 있어·…(중략) 정말이야. 맹세해. 밤에 해가 가는 곳, 바로 거기를 볼 수 있어.(p27).” 이후 클라라가 조시의 집에서 해가 맥베인 씨 헛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조시에게 “왜 해가 그런 곳으로 쉬러 가는지 궁금해요(p.87).”라고 묻는 건 당연하다. 조시가 말한 해가 지는 곳이, 헛간 같은 곳으로 갈 거라 생각을 안 했는지, 조시에게 다시 묻는다. “근처에 뭐 특별한 게 있었어요? 입구 같은 것? 땅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라든가?(p.87)” 조시는 “·…(중략) 궁전으로 가는 입구가 있다면 아마 숨겨져 있을 거야. 해가 막 도착한 순간에 문이 열리지 않을까? …(중략)”라고 말한다. 이제 클라라에게 헛간은 단순한 헛간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곳에는 해가 내려가는 궁전이 있을 수도 있으니, 클라라에겐 일종의 교회이자 제사 장소가 된 것이다.

클라라는 해의 적을 쿠팅스 머신이 뿜어내는 공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클라라는 첫 번째 제사를 지내며 이렇게 말한다. “해가 공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요. 공해 때문에 얼마나 슬프고 화가 나는지요....... 제가 그 기계를 찾아내서 망가뜨린다면요. 공해를 더 만들지 못하게 끝을 낸다면요. 그런다면 그 보답으로 조시에게 특별한 도움을 줄 수 있나요?(p.247)” 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클라라는 당연히 해의 적을 공해라고 생각한다. 이후 조시의 아버지 폴과 함께 쿠팅스 머신을 발견하고 이를 고장 내기 위해 자신의 머리 안에 있는 P-E-G 나인(Nine) 용액을 꺼내기까지 한다. 클라라는 자신의 주인 조시를 위해 자기희생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실현한다(물론 클라라는 쿠팅스 머신이 여러 대가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AI 로봇으로 만들어진 클라라가 과거 인간처럼 태양을 숭배하는 모습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특히 그녀가 태양을 믿는 과정이 플라톤의 동굴과도 같아서 그 안에서 한 번 더 역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첫 번째 역설은 최첨단 과학과 고대 종교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두 번째 역설을 위해 플라톤의 동굴 얘기를 떠올려보자. 동굴 속의 사람은 그림자를 보고 동굴 밖에는 정말로 무서운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것은 없는데 말이다. 클라라가 태양을 믿는 과정은 플라톤의 동굴과 유사하다. 사건을 분석하기보다는 몇 가지 사건 속에 태양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태양을 떠받든다. 플라톤은 동굴을 나와 태양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했는데, 모순적이게도 클라라는 다른 의미로 태양을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이 책의 재밌는 부분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클라라를 위해 우연한 일들을 끝까지 밀고 간다는 점이다. 클라라가 처음 헛간에 간 다음, 조시는 릭과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했다. 클라라가 다시 헛간에 가서 해에게 간절한 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 조시가 햇빛을 받자 그렇게 아팠던 조시가 “와. 왜 이렇게 눈부셔?”라고 말하며 일어난다. 클라라는 이 상황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해는 계속 빛을 가차 없이 조시에게 쏟아부었다.(p.411)’ 그리고 조시가 정신을 차린 이후 창밖을 보니 다시 어둠이 하늘 위로 번지고 있었다(p.412). 클라라에게는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종의 배려를 통해 우리는 클라라의 순수한 믿음이 이어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게 된다. 작품 밖에서 클라라의 행동을 보면 고대 종교에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보면, 클라라는 주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충직한 모습으로 비친다. 그래서 우리는 클라라를 보고 불행하다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 속에서 마지막 시지프에 관한 얘기와 똑같다. 주인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클라라의 삶이고, 그것이 클라라의 기쁨이니까, 우리는 이를 보고 동정할 필요가 없다.




초상화


“이걸 알아야 해요. 새로운 조시는 모조품이 아니에요. 진짜 조시가 될 거예요. 조시가 계속 이어지는 거라고요(p.304).”


과거 초상화는 있는 그대로를 그리기도 했고, 그림의 대상을 좀 더 아름답게 그리기도 했다. 작중 카팔디가 만든 조시의 초상화는, 클라라의 눈에도 조시의 외모와 정확히 일치한다. 카팔디와 크리시는 조시의 초상을 통해 조시의 죽음을 대비한다. 만약 조시가 그녀의 언니 샐처럼 죽어버리면, 조시의 초상화를 클라라에게 입혀서 조시를 영원히 이어나가려는 계획이다. 이런 미친, 혹은 간절한 생각의 배경에는 카팔디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중략) 우리 세대는 여전히 과거의 감정을 지니고 살죠. 마음 한편에서 그걸 붙들고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내면에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계속 믿고 싶어 해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당신도 알고요. ·…(중략) 두 번째 조시는 모조품이 아니에요. 정확히 똑같은 존재니까 당신이 지금 조시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그 애를 사랑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사실 믿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합리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되죠. 나도 그렇게 해야 했고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아주 좋아요. 당신도 그렇게 될 겁니다(p.308).”


카팔디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클라라가 조시의 겉모습을 가지고 조시와 똑같이 행동(말, 습관 걸음 등 모든 것) 한다면, 그것이 조시라는 것이다. 그의 얘기는 1990년대 이후부터 사람들이 복제 인간 얘기가 나오면 꼭 나오던 주제 중 하나다. 여기서 카팔디의 마음의 존재 여부에 관한 얘기는 이율배반 원칙에 따라 거짓과 참을 동시에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오류가 있는데, 그는 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의견을 간과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그의 의견은 당시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했던 일자(一者) 개념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이 상태로 영원한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같은 존재인가? 그것을 보증하는 방법은 DNA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나”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DNA를 얘기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신분증이 “나”를 증명해 주는가? 법적으로는 그러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처음 주민 등록증을 만든 시점의 “나”가 진짜 “나”인 것은 아니다. 결국 “나”라는 것은, 지금도 찰나의 순간마다 변하고 있다. 그러니 카팔디가 말하는 조시는, 저 순간의 조시일 뿐, 진짜 조시는 아니다. 카팔디와 크리시의 생각은, 그녀의 너무 강한 모성애와 과학 기술이 만든 진짜에 대한 집착에 불과하다.

진짜 조시에 대한 생각을 카팔디와 크리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작중 릭은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조시가 달라진다는 거야. 나는 오늘 오면서,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조시가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조시는 그냥 조시일 거라고.” 릭, 카팔디, 크리시에겐 각자 그들만이 생각하는 조시가 존재한다. 그리고 조시가 그런 상태로 머무르길 바란다. 이렇게 타자화된 조시에 대해서 다들 그것이 무엇이라 정의하지 못한다.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조시가 조시라고 말할 뿐이다. 남들이 말하는 “나”가 진짜 “나”는 아니다. 그것이 옳다고 한다면, “나”는 온전히 “나”의 모든 결정권을 타자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인간이 사람과 어울려 살며 “나”를 찾아가는 것은 맞을지도 모르지만, 타인이 “나”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약속의 연속


“너는 내 방에서 지낼 거야. 벽장이나 그런 데가 아니라.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재밌는 일 전부 같이 하자(p.44).”


어린 조시는 클라라와 약속한다. 클라라는 이 약속을 믿고, 다른 아이가 자신을 구경하러 왔을 때, 일부러 아무 표정 없이 아이가 아닌 아이의 뒤쪽 반대편 벽에 있는 빨간 선반에 시선을 뒀다(p.53). 이를 본 매니저가 클라라를 배려해 다른 모델을 소개해 준 뒤, 클라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말 잘 들어 봐. 아이들은 툭하면 약속을 해. 창가로 와서 온갖 약속을 다 하지. 다시 오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해. 그런 일이 수시로 일어나(p.57).” 물론 조시는 다시 와서 클라라를 구매했다. 하지만 조시는 추후에 클라라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한다.

조시의 집에 친구들이 놀러 온 날, 그들은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대하는 것처럼 클라라와 B3 모델(B3 모델은 공중으로 돌려도 늘 발로 착지할 정도로 클라라 보다 성능이 좋은 것 같다)을 비교한다. 클라라는 조시의 친구들이 질문하고 뭘 시켜도 대답을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조시가 자신이 대답하기를 바라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시는 이런 건 알아서 판단하리라고 생각했지만, 클라라는 주인의 명령을 듣는 기계니까, 조시가 시키는 걸 하는 게 당연하다. 클라라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팔이 긴 아이가 조시에게 “조시, B3을 살 수도 있었지 않아? 왜 안 샀어?”라고 말한다. 그러자 조시는 웃으며 “이제 그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조시의 행동에 어떤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클라라와 조시, 그리고 매니저의 얘기는 사실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매니저가 하는 얘기의 단어만 조금 바꿔보자. “연인들은 툭하면 약속을 해. 사랑한다, 널 위해 뭐든 하겠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다. 그런 일이 수시로 일어나.” 너무나도 익숙한 말들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마치 그럴 거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며 변화하는 존재이고, 우리가 내거는 약속이 얼마나 쉽게 버려지는지를 보여준다. 정의, 공정성 등 사회에서 내거는 것들도 그러하다. 우리 삶은 약속을 어기는 일의 연속이다. 우리는 애초에 지켜지지 않은 걸 알면서도 서로에게 실망하고, 짜증을 내고, 힘들어한다. 그 말이 발화되는 순간에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이 지켜질 것이고, 이뤄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존재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야생 동물


폴이 조시를 만나자 이렇게 말한다. “여어, 조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생 동물(p.275)!” 이후에도 폴은 조시를 보고 야생 동물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부모님들이 자식을 보고 강아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건가 싶었다. 작중 야생 동물은 좀 무서운 이미지로 나온다. 클라라가 폭포에 가서 황소를 마주했을 때의 묘사를 보자.


“황소의 외양에 너무 놀라서 나는 소리를 지르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분노와 파괴욕의 신호를 동시에 이처럼 과도하게 발하는 무언가를 본 적이 없었다. 얼굴, 뿔, 나를 응시하는 차가운 눈 등이 내 마음에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그뿐 아니라 무언지 알 수 없는 낯설고 깊은 어떤 감정도 일으켰다·…(중략) 땅 밑 어딘가에 흙과 어둠으로 덮여 있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풀밭에 나와 있다니 뭔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오류가 벌어진 것 같았다(p.154).”


클라라의 얘기를 듣고 야생 동물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면, 좀 의아하다. 거기다가 조시가 정말로 야생적인, 그러니까 자연적인 인간이냐? 조시 또한 유전자 향상을 받은 인간이다. 그래서 자주 아프고 힘들어한다. 조시는 야생이라고 부르기엔 다분히 인위적인 인간이다.

그렇다면 폴이 조시를 야생 동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 폴이 속한 사회를 봐야 한다. 폴은 “대체”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지만,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행복하게 산다. 릭의 엄마 헬렌은 이 공동체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저 거기 사람들이 다들 백인이고 이전에 전문직 엘리트였다길래 한 말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또 다른 사람들에 맞서기 위해서 무장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사실 좀 파시스트적으로 들리긴 해요·…·…(p.340).” 폴이 속한 사회는 일종의 백인 우월주의 단체, 혹은 국가 밖의 무장 단체처럼 보인다. 폴이 조시를 야생 동물이라 부르는 것은, 조시가 기계적인, 인위적인 사회에서 살아가기보다는, 자신처럼 사회 밖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폴이 조시에게 바라는 모습은, 사실 릭일지도 모른다. 릭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유전자 향상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하고, 조시보다는 매우 건강하다. 좋은 점만 보면 폴이 옳았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릭은 향상을 받지 않아서 오블롱을 통해 수업을 들을 수도 없고 대학에 진학하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릭이 향상을 받지 않은, 혹은 못한 이유는 아마도 헬렌이 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작중 사회는 좀 끔찍한 사회다. 향상 받지 않은 아이는 명문 대학에 가기도 힘들고, 수업도 받을 수 없으니까. 그리고 물리적인 학교가 존재하지 않아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교류 모임에 가야 하는데, 향상 받지 않은 아이는 교류 모임에도 참가하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작중 사회는 좀 특이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오블롱을 통해 수업을 듣고,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p.354), 조시의 아버지 폴은 ‘대체(아마도 기계가 대체했다는 말인 거 같기도 함)’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 행복하게 사는 중이다. 뭔가 우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적인,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사회의 모습을 반반 정도 잘 섞은 모습이다. 작가가 이와 같은 세계관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이것이 현실적인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노미 상태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라고 본다.




안녕 클라라


클라라는 야적장에 버려졌다. 조시의 말처럼, 조시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같이 있었지만, 이제는 쓸모를 다해 버려진 기계가 됐다. 그곳에서 클라라는 다시 매니저를 만나게 된다. 클라라와 매니저가 나누는 대화는 마치, 임종을 앞둔 이와의 대화 같다. 클라라는 버려졌음에도 이렇게 말한다. “매니저님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저에게 최고의 집이었어요. 조시는 최고의 아이였고요.” 최고라는 단어는 비교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데, 클라라는 다른 집에서 산 적이 없으니, 최고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클라라가 최고라고 하면, 우리는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이 만족했으니 우리는 수긍해 줘야 한다.

클라라는 매니저와의 대화를 통해 카팔디의 얘기를 반박한다.


“카팔디 씨는 조시 안에 제가 계속 이어갈 수 없는 특별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중략) 하지만 저는 카팔디 씨가 잘못된 곳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p.442).”


클라라의 얘기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얘기는 명확해진다. 결국, 진짜 조시라는 것은 조시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마지막 문단은 꽤 인상적이다. 클라라는 마지막까지도 매니저의 안위를 걱정한다. 이때 매니저가 다시 돌아보는데, 그는 클라라를 본 것이 아니라, 저 먼 곳, 지평선 근처 건설용 크레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클라라에겐 이별이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매니저에게는 이별이 이제 익숙해진 일이다. 매니저는 아마도 이렇게 버려진 AF를 수도 없이 봤을 것이다. 그가 지평선 근처 건설용 크레인을 본 것은, 그곳으로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클라라는 이렇게 말했다. “매니저 뒤에 드넓은 하늘이 있었는데도 매니저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이 말은, 매니저의 뒤에 태양이 있어서 그늘진 것이 아니라, 매니저가 바라보는 방향에 태양이 있어서 매니저의 얼굴에 빛이 들어와 잘 보인다는 말이다. 그가 돌아가다가 다시 클라라가 있는 방향을 본 것은,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말한 것처럼, 해가 지는 것을 통해 클라라의 활동이 끝나는 것을, 그리고 책의 마무리를 말한다.




『클라라와 태양』, 그 밖의 이야기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아버지와 헬렌, 릭과 조시가 극장 앞에 가는 장면이다. 이 대목을 보면 클라라가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약 20페이지 가량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화를 오고 가는데, 정말로 내가 사람이 많은 극장 앞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얘기를 듣는 느낌을 준다.

나는 책 표지 다음에 태양의 움직임을 그린 그림이 참 좋았다. 마치 클라라가 창을 통해 태양을 보는 것처럼, 네모난 창 안에서 태양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간대에 따라 다른 하늘색과 태양의 색을 통해 묘사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번 소설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속 모순적인 점과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을 말한다. 클라라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조시를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클라라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조시의 삶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자신에게는 정말로 위험한 일이고, 이 관계의 끝이 버려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야적장에 버려진 클라라의 모습이 슬프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클라라는 매 순간 진심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했고, 그런 이유에서 클라라의 삶은 한낮에 뜬 태양처럼, 성녀 클라라(Clara)처럼 빛이 난다. 설령 클라라 본인은 서서히 꺼져가는 중일지라도 말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얘기하고자 하는 희망은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져야 하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후회와 실수로 얼룩질 수밖에 없다. 내가 경험한 일보다 경험하지 못한 일이 훨씬 많으니까. 또한, 내가 정할 수 없는 타인에 의해서 실망하는 일도 많다. 이성적으로는 안 될 걸 알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로 인해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했다고, 혹은 실망했다고 냉소적인 태도로 살아가지 않는다. 다시 도전하고, 다시 사람을 믿는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지켜야 할 신념이나 가치를 찾고, 그것을 가지고 살아간다. 칸트의 말처럼, 모순이기도 하지만, 참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우리는 내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저앉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떠오르는 새로운 태양처럼, 그 태양을 따르던 클라라처럼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아직 남아 있는 나날이 많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피카소 : Into The Myth」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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