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 공간이 나를 지배한다?
번역은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출퇴근시간이 10초 이내라는 점이 재택근무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하지만 책상까지 10초면 도착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책상까지 몇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결근을 하게도 된다는 점이 문제다.
아침에 간단하게 밥을 준비해서 아이들을 먹여 등교를 시킨다. 부산하게 준비해서 애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나면 달콤한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때 가장 생각나는 건 커피다. 핸드폰으로 카톡이나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뉴스화면을 뒤적이며 따뜻하게 내린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다 마시고 커피잔과 함께 어제 늦은 시간에 먹은 야식의 흔적을 치운다.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설거지하는 데 소모하고 싶지는 않기에 그릇은 그대로 싱크대에 모아 둔다.
그러고 나면 책을 읽고 검토서를 작성할 수 있는 시간이다.
예전처럼 책을 쌓아놓고 휘리릭 훑으며 책을 검토할 때는 그 책에 대한 느낌이 확실해질 때까지 커피를 마시면서도, 소파에 앉아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아니면 빨래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책을 펼쳐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PDF 파일로 책을 검토해야 하다 보니 각 잡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켜야만 책을 읽게 된다. 내가 가진 가장 중요한 수업자료며 검토자료들은 모두 컴퓨터에 들어 있다 보니 컴퓨터 옆에서는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핑계일 수는 있지만, 전자책은 나와 책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더 크게 만드는 것 같다. 게다가 책상만 잠깐 벗어나면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집안일이 잔뜩 쌓여 있으니 책상과 빨래 사이, 책상과 설거지 사이, 책상과 청소기 사이에서 나는 자주 심리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방황한다.
그렇게 나만의 공간을 꿈꾸기 시작했다. 오로지 책, 번역 그리고 글에만 몰입하고 싶었다.
집에서 작업하면 공짜인데 굳이 돈을 들여 사무실을 구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지 한동안 고민했다. 머릿속으로 고민만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싶어 일단 내가 투자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으로 어떤 사무실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우리 동네에는 아직 빈 상가건물이 많다. 특히 1층이 아닌 2층, 3층에는 빈 상가가 더 많다. 나는 1층보다는 2, 3층이 더 좋았기 때문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10평 정도의 상가를 구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월세 70만 원을 내면서 사무실을 유지하는 것이 효율적 일지 여전히 의문이 든다.
사무실 문제를 결정하지 못하고 한두 달 고민이 지속되던 중 우연히 우리 동네에 새로 오픈하는 공유오피스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큰 부담 없는 가격도 장점이지만 사무가구나 사무용품을 따로 구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게다가 한 달씩 계약을 하니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와도 된다.
2.5평의 작은 사무실이지만 책상과 컴퓨터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집중력은 최고다. 글이 술술 써진다. 카톡과 전화 그리고 자잘한 일정들이 계속해서 나의 집중력을 방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이 작은 공간이 고맙다. 복도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 옆 사무실에서 떠드는 소리도 가감 없이 잘 들려, 그만큼 내 사생활도 별로 보장되지는 않을 거란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올해까지는 2.5평 사무실에서 지내보기로 결심한다. 이 사무실에 있는 동안 과연 번역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맘속으로 내기를 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나에게 독일 아이스와인 한 병 선물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