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우리의 대인관계의 어려움과 '교차성'에 대한 이야기
오랜만에 한국인 지인을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더블린을 향했다. 퇴사 후, 더블린 시티를 자주 나가지 않았기에 오랜만의 반가운 외출이었다.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매일 입던 아디다스 검정 레깅스가 아닌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재킷과 청바지를 꺼내 입고, 구두도 신어 본다. 출퇴근 그 익숙했던 풍경들을 지나, 역에 내리고, 교통카드를 찍고 역 밖으로 나와 지인 K가 보내준 톡을 확인한다. K의 톡에는 약속장소를 알려주는 지도링크가 함께 전송되어 있다.
한국과 영국을 거쳐 아이리쉬 남편과 함께 다시 더블린에 정착하게 된 지인 '케이(K)'. 케이는 만나는 순간부터 역으로 기차를 타러 가는 순간까지 아일랜드로 돌아와 근 6개월 동안 경험한 한국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듯, 유럽이라는 곳에서 한국인 커뮤니티라는 것의 의미는 참으로 복잡하다. 때로는 힘든 시기 가족보다도 가까이에서 나를 챙겨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쉽게 상처받고 다투고 갈라서는, 많은 험담들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케이 또한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고마운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마음고생을 시켰던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고 했다. 특히 한인 교민들과 관련된 사업을 하거나, 한국 교민, 유학생, 워홀러 커뮤니티에 속해 있는 경우라면 이 공간 안에서의 갈등이라는 것이 참 피하고 싶어도 피하기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번 드는 질문,
왜 우리(한국인)는 나와서도 이렇게 한국사람 때문에 힘이 들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나와서 처음 하는 생각은 "더 이상 한국인 혹은 한국 커뮤니티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6개월, 1년 생활하다 보면 그 다짐이 무색하게, 한국인들 커뮤니티에 자의든 타이든 섞이게 되고, 한국인끼리 혹은 동아시아 (중국, 일본, 대만 등) 문화권끼리 더 빠르게 가까워지기도 한다. 해외생활이 여러므로 힘든 것들이 많다 보니, 말이 잘 통하고 같은 문화권에서 살아온 동양사람들끼리 빠르게 친해지기 마련이고, 특히 같은 한국 국적의 사람이라면, 태어나 자라온 환경이 비슷하고 정서가 비슷하다 보니 보다 빠르게 친해진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갈등을 경험하고, 다투고, 싸우고 혹은 다시는 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늘 이런 고민이 들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나와서도 한국인끼리 얼굴을 붉히는 일이 많을까?'. 아마 다들 미드를 통해서건, 해외에 살다 온 주변 지인을 통해서건 혹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건 해외에 나와, 그 사회 주류백인들과의 갈등만큼이나, 한국인들 내부에서의 갈등 때문에 마음고생하는 이야기들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타국에 나와서도 한국인들이 한국인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유 중 큰 부분은 '교차성(Intersectionality)'의 렌즈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물론, 다양한 갈등과 개개인의 상황을 모두 하나로 뭉뚱그려 해석할 수는 없다. 다만, 사회문화적으로 해석해 볼 때, 교차성은 참으로 좋은 개념이 되어 준다.
다시 말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쉽게 친해지지만 이윽고, 사회경제적, 그리고 가치관, 젠더, 정치적 관점 차이 등의 더 깊은 곳의 극명한 '차이점' 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크게 갈등을 경험하며 빠르게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을 사회문화에서는 '교차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란, 개인의 정체성이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온전히 무조건적인 피해자 혹은 차별의 대상으로서의 당사자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은 일정 부분에서는 차별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다른 부분에서는 '특권'의 수혜자이기도 하다는 개념으로, 개인이 경험하는 '차별'을 설명하는 분석방법이다(AAUP, 2018).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은 하나('예컨대, 한국인이라는 국적과 동아시아인이라는 인종의 정체성) 로만 설명되지 않으며, 다양한 부분 ('예를 들어 같은 한국인이지만 소득 수준과 학업 수준, 해외체류 기간, 비자 종류 등)에 따라, 동시에 일정 부분 다른 사람들( 다른 한국인들) 과는 다른 특권을 가지기도 한다는 개념이다.
아래의 그림처럼 한 사람을 구성하는 데에는 다양한 부분들이 존재하고, 따라서, 개인은 어느 부분에서는 매우 차별을 받는 사람이지만, 다른 위치에서는 또한 굉장한 특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백인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젠더적인 차별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백인이기에 다른 흑인들에 비해 인종차별에 놓이지 않는 특권을 가지기도 한다.)
교차성의 개념은 비단, 해외에서만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같은 학교를 나와서, 같은 지역 출신이어서 등 공통사를 기반으로 급격하게 짧은 기간 동안 친해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깨닫고 혹은 맞지 않아서 다투고, 멀어진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속상한 마음들은 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을 번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바로 교차성에 기반한, '나와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마음과 경청'이다.
같은 지역, 같은 언어, 같은 인종이라고 해서 내 힘든 상황을 너무 잘 공감해 주고 이해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그 관계에 너무 많은 것들을 훅 쏟아붓지 말자. 숨을 한번 크게 쉬고, 찬찬히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을 알아가 보자. 그리고, 절대 성급하게 나와의 공통점을 기준으로 모두가 같다고 생각하지 말자. 특히 이러한 생각은 나의 정체성(젠더, 인종 혹은 출신지역과 계급 등)이 주류 환경( 백인 주류의 유럽사회, 영어권 국가에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상황 등)에서 배척받는 상황에, 나와 비슷한 정체성,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류이다.
예컨대, 한국인이라는 인종과 언어의 차이로 주류사회에서 배척받거나 혹은 고생하고 있다면, 나와 같은 한국사람을 만났을 때 너무 반가운 나머지 쉽게 나와 같은 마음과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속단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사회경제적 배경 혹은 아일랜드에서의 사회경제적 배경, 직업, 소득, 거주지역 등 수많은 이유로 인해 나와는 매우 다른 경험을 하고 살아갈 수 도 있다. 예컨대, 나는 워홀러여서 안전한 곳을 찾아 집 구하기나 집주인의 갑질에 고통받으며 하루하루 주거불안을 경험하지만, 상대방은 같은 한국인이지만, 이미 현지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거나 혹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한국 가족의 지원을 받아 안전하고 시설 좋은 기숙사에서 한 번도 주거불안을 경험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도 있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결국 대화는 나의 하소연과 공감받지 못했다는 절망감으로 끝날 수도 있다.
나와 같을 것을 가정하고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아무런 지지도 위안도 받지 못했을 때의 기분은 절망적이다. 그렇기에, 쉽게 속단하지 말자. 이 또한 다른 상처로 가는 지름길 일 수 있다. 이럴 때에는 조금 숨 고르기를 하고 천천히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나와 완벽히 같은 상황과 경험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이렇게 모든 인연들이 밀어내고, 실망하고 좌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는 손절이 아닌 '느슨한 연대 맺기'를 추천한다.
여전히 공통점 때문에 경험하는 어려움들이 있기에, 밀쳐내기보단 그 관계들에서 함께 보듬고 연대하고 오랫동안 조금은 느슨한 친구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앞선 예시처럼 주거불안에서는 서로 다른 상황이지만, 아시아 여성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성차별이나 인종차별 들에 대해서는 함께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고 또 필요할 때는 함께 목소리를 내어주거나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 다른 부분은 인정하되, 다만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차별이나 어려움들에 대해서는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필요시 도움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이렇게 느슨하지만 서로의 교집합 부분들에서 함께 연대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건강한 관계를 이어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같은 한국인인데 (혹은 마이너리티인데) 나만 이렇게 힘든가? ' 하고 좌절하지도 말자.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친해지지만 막상 알고 나니 나만 힘든 것만 같은 그럼 마음이 들 때, 나는 내가 가진 '특권'을 되새겨 본다.
교차성이 주는 가장 큰 울림은 바로, 우리 모두 어느 한 지점에서는 '특권(privilege)'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될 때 이 단어가 매우 거창해 보이나, 사실은 그저 내가 남보다 타고나기에 조금 더 낫게 주어졌던 그런 것들을 의미하는 게 조금 더 적절한 표현일 듯하다.
나 또한 이곳에서 한국인 백인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나만 이렇게 힘든가 싶어 좌절할 때도 많았다. 그 마음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들어갔던 대학원에서는 사실 내가 가진 피해와 차별보다, 내가 가진 많은 특권들을 발견했다. 인권학 공부의 과정은 피해자이고 소수자인 줄 만 알았던 동아시아 여자인 내가 사실을 얼마나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친구들에 비해 비자를 받는 것에 대한 별 스트레스가 없었다. 그저 몇 년에 한 번씩 갱신하러 가는 것이 귀찮을 뿐이었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불법체류나 범죄 문제가 적은 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중동지역이나 아프리카 지역 친구들보다 비자심사에 수월하고, 맘고생이 덜하다. 그들은 며칠을 불안해하며 비자심사를 가고 수시간을 기다릴 때, 나는 요청서류만 내면 대부분 크게 기다리지 않고 비자가 발급되는 특권이 있었다. 또한, 부유하지 않아, 목돈이 드는 유학이나 워킹홀리데이로 아일랜드 생활을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지역사회복지 관련 업무로 커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한국인들보다도 아이리쉬 지역사회의 네트워크들을 통해 다양한 정보나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었고 빠른 시간 내에 다양한 커리어를 경험할 수 있었다.
사실 많은 부분에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 모두의 삶이 모든 조건에서 불리하거나 항상 유리하지만은 않다. 그렇기에 항상 내가 가진 특권들이, 타인에게 가시가 되어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는 마음 또한, 느슨한 관계 맺기만큼이나 필요하다.
모두가 나와 같지 않다고 모두가 틀린 것은 아니다. 누구나 나와 같을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찬찬히 그 사람들을 만나보자.뜨거운 국밥국물 같은 사이보다는 오랜 시간 천천히 졸여지는 떡볶이 국물처럼, 그 안에 가래떡도, 꿀떡도, 밀떡도, 쌀떡도, 모두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그런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보자.
아까 본 그 양들도, 뒤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다르다. 그리고 비슷해 보이는 양들도 저마다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