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연애]
몇 년 전 이사를 했다. 이민 후, 줄곧 지내던 6년간의 더블린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북적북적한 더블린을 벗어나 기차를 타고 한 시간쯤 달려야 나오는 근교에 생애 첫 주택생활을 시작했다.
이사를 하고 첫 달. 전원생활의 낭만에 설레고 있던 나는 이 텅 빈 집에 무언가라도 채워 넣고 싶었다. 이사를 한 후, 빠듯한 통장잔고에 많은 것들을 여유롭게 장만할 수는 없었기에 무엇을 해야 가장 그럴듯하게 이 공간을 채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떻게 아늑해 보이는 집을 만들까 고민하던 중, 덩그러니 텅 빈 앞마당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저 텅 빈 앞마당을 채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가족이 된 연인 K에게 말했다.
" 문득, 저 앞마당이 너무 허전해 보여. 나는 저 앞마당에 온갖 장미와 꽃들을 가득가득 심고 싶어. 봄, 여름 예쁜 꽃들을 보면 집도 조금은 화사해 보이지 않을까?"
그러자, 아직 정리가 덜 된 커피 장비들 속에서 이것저것 커피 내릴 장비들을 꺼낸 후, 새로 산 원두를 갈아 방금 내린 드립 커피를 나에게 건네며 K가 말했다.
" 꽃은 화려해서 예쁘지만, 새가 모일 수 없잖아. 그보다는 새들이 계절별로 모여들 수 있는, 그런 작은 나무를 심는 게 어때? 매일 아침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행복할 거야"
나는 K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가 꽃을 심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내가 지나가며 본 다른 전원주택들의 화려한 조경 때문이지 않았을까. 형형색색 예쁜 꽃들로 꾸며진 잘 가꾸어 놓은 화단들을 보며, 왠지 그 집은 근사하고 화목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앞마당을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해 여름, 앞마당에 작은 나무들을 심었다.
비단, 앞마당을 어떻게 채울까에 대한 고민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많은 부분 더 화려하고 예쁜 것들에 많은 에너지를 쓰며 살아간다.
삶의 많은 부분 내 취향과 선호가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의 소셜미디어 (인스타, 틱톡, 유튜브)로 덮힌다.
삼십 대가 되면, 중산층 이상의 연봉을 버는 직장이 있고, 집이 있으며 외제차를 타는 그런 삶을 매번 소셜미디어에서 보게 되니, 왠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무언가 뒤처져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기도 했다. 한동안은 관찰형 예능들이 인기를 끌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려한 유명인들의 집, 인테리어들이 소개되고 왠지 그렇게 살아야만 그럭저럭 중간은 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일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삼십 대 내 집마련이 아무래도 화두이다 보니, 아일랜드에는 한동안 '인스타 주방', '인스타 욕실', '인스타 가든'이라는 말이 3040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곤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진짜 나의 모습, 나의 취향보단, 인스타그램에서 본 듯한 디자인, 모습으로 내 공간을 꾸며나가고,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보여주는 것이 큰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 그래서 집들이로 초대받아 가는 집들마다 모두 비슷한 인테리어에 비슷한 모습이었다. 점점 모두가 인스타에서 봤던 '그 집'처럼 비슷비슷해져만 간다.
그래서 이제는 그 인스타그램 속 한 장면이 되기보다는 다양한 새들이 모여드는 작은 나무가 돼 보기로 한다. 조금 투박해 보일지라도, 내 취향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그런 둥지를 만들어 본다.
지난번 서울에 갔을 때 친구가 만들어준 친구가 직접 찍은 한강 사진으로 만든 커튼도 서재 한편에 걸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맘 껏 들을 수 있는 스피커도 거실 한편에 놓아 본다. 그리고 우리 집 강아지가 잘 보일 수 있도록, 강아지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강아지 침대도 놓아본다. 주방엔 K가 가장 사랑하는 드립커피를 매일 내릴 수 있게, 수납장 한 칸을 모두 필터커피 장비로 채워 넣어 본다. 마지막으로, 우울한 날 마구 먹을 수 있게 고추장, 라면, 고춧가루, 참기름도 잊지 않고 채워 넣는다.
소셜 미디어에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화려한 모습은 없지만,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마음껏 만들어 줄 수 있는 한식 재료들이 내 주방을 채운다. 매일 아침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한강 뷰나 조망권은 없지만, 매일 아침 K가 만드는 진한 커피향기로 눈을 뜨고, 마당의 새소리를 들으며, 새롭게 날아드는 새들을 구경한다. 한동안 멍 때리고 거실에서 새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집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쓰다듬어 달라고 내 무릎옆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내 공간을 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