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올바른 의료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은 오랜만에 친한 고등학교 동기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는 썩 공부를 잘했던 친구인데 의대 진학 후 기나긴 과정을 마치고 얼마 전 연고지 근처에 개원을 했다. 축하의 의미로 당신이 밥을 사기로 한다.
"뭐 먹을래? 내가 살게"
그런데 이 의사 친구의 대답이 영 피곤하다.
"고마워. 이 지역 중식 코스의 가격대는 인당 6만원 대이고, 전반적으로 기름지기 때문에 약간의 체중 증가가 야기될 수 있어. 내 주변에서 중식을 먹은 사람들의 80% 정도는 매우 만족했고 15%는 만족, 5%는 매우 불만족했어. 한우의 경우는 인당 7만원정도를 평균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먹고 나면 고기냄새가 옷에 밸 수 있어. 만족도는 중식보다 조금 더 높은 편이야. 꼭 둘 중 하나를 먹어야 하는건 아니야. 최종 결정권은 너한테 있어. 어떤걸 먹을래?"
"아니 넌 뭐가 먹고 싶은데? 너가 먹고 싶은 걸 먹자"
"나는 중식을 더 선호하긴 하지만, 한우를 먼저 먹어보고, 경과를 보면서 2차로 중식을 먹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내가 결정할 수는 없어"
"... 뭐라고?"
대체 의사들은 왜 하나같이 이런 식인걸까?
한 면접에서, 난 이런 질문을 받았다.
"환자가 원하는 치료와, 의학적으로 권장되는 치료가 서로 다를 때 어떤 것이 우선된다고 생각합니까?"
면접 대상자는 나를 포함해 3명이었다. 한 명은 환자는 의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잘못될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의사가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다른 한 명은 의료에 대한 의사 결정권은 환자에게 있기 때문에 충분한 정보를 주었다는 가정 하에 환자가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마치 토론의 승패를 가르는 자리에서 마지막 표를 던질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면접관이 물은 것은 어떤 상황일까? 명백한 패혈증* 환자가 나는 죽어도 상관없으니 집에 가겠다고 우기는 상황일까? 아니면 수술 시 절개선의 끝자락을 목 뒷쪽으로 할 건지 앞쪽으로 해야할지 결정하는 상황일까? 전자의 경우는 당연히 권장되는 치료가 우선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환자의 의사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전자에서 의사가 환자를 강박해서라도 치료를 진행해야 할까? 후자에서 환자가 원하는 방식의 절개가 사실 의사가 가장 자신없는 방법이라면 그래도 그렇게 수술해야 할까? 치료는 누가 결정해야 할까?
오늘 날 개인의 신체와 건강 결정권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지며 이 중 대부분은 안락사, 장기 매매 등 윤리학적으로 매우 무거운 영역에서 다뤄진다. 그러나 환자와 의사의 치료 결정권 문제는 매일 매일 진료실에서 아주 사소한 일로도 발생한다. 항생제를 5일이 아니라 10일 먹으면 안되나요? 제가 통증이 너무 무서운데 전신마취로 수술할 수는 없을까요?
치료 결정에 대해 의과대학에서 배우는 가장 모범적인 답안은 의사와 환자가 함께 칼자루를 쥐는 것이다.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오랜 시간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한다. 의사와 환자의 의견이 합치되면 치료가 시작된다. 이러한 과정을 공동의사결정 모델이라 한다. 우리는(6년간 반복적으로) 의료가 의사로부터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공급되는 것이 아니며, 환자가 결정 과정에 함께 참여하여야 한다고 배운다. 그 과정에 포함되지 못하는 환자는 소외감과 불안감을 느끼며, 자기 신체에 대한 권한을 자유로이 행사할 수 없다고. 이러한 공동 의사 결정 모델은 1950-60년대부터 기존의 권위적 모델(paternalistic model)에 대한 반작용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1990년대 이후로 의사 결정에 있어 가장 우월한 이상향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의료 현장과 의학 교육에 큰 변혁을 일으켰으며, 그때까지 이어지던 권위적 모델, 곧 "환자분, 제가 맞으니까 군말말고 시키는대로 하세요"는 "수술 여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로 변했다.
그런데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환자들을 만나기 시작하면 그동안 배워온 것들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실제 의료 환경에서 치료 결정의 최종 선택권은 보통 환자에게 주어진다. 이것엔 환자의 자결권(Autonomy)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윤리학과 거기서 비롯된 법적 사유가 크게 작용한다. 그런데 공동의사결정 모델과 환자에게 주어진 최종 선택권은 간혹 젊은 의사를 수렁에 빠뜨린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환자들이 항상 옳은 선택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환자의 선택이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환자가 치료를 거부해 벌어지는 상황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환자가 무의미하거나 잘못된 치료를 요구하는 경우들도 있다. 그것은 환자의 지식이나 이성, 판단력 뿐만 아니라 감정 상태와 배경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환자들은 공포에 질리거나 우울에 빠지며, 분노하고 의심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무의미한 수술을 요구하게 만든다. 어떤 이들은 의사의 치료가 자신을 희생양 삼는 실험이라 생각해 유일한 치료를 거절한다. 잘못된 이유를 자신의 병의 원인으로 생각하며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가장 현명한 이들조차 본인의 병으로 인한 일종의 심신미약 상태에서 틀린 결정들을 할 수 있다. 프로스트(2011)나 간츠(2005)의 연구는 심지어 지역, 문화권, 인종 등의 요소도 환자의 말기 의사 결정에서 유의미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인 바 있다. 내가 수련 과정 중 들었던 말 중 하나는 서구권과 동양권이 안면-두경부의 흉터에 대해 받아들이는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동양권이 상대적으로 수술적 치료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이유로 비롯된 환자의 나쁜 선택은 쉽게 나쁜 결과로 이어진다. 입원을 거부하고 집에 갔다가 결국 응급실로 실려와 중환자실 치료를 받은 심경부감염 환자, 의사의 권유에 반해 강력하게 질식분만(또는 제왕절개)을 고집하다가 불필요한 피해를 입는 산모의 사례는 흔하다. 무리한 수술에 대한 환자의 강경한 요구는 위험한 결과를 야기할 지도 모른다. 치료 자체의 위험성에 더해 간혹 의사의 호승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의사에게 실패에 대한 고민을 덜어주며(난 분명히 반대했는데 환자가 해달라고 했잖아?) 동시에 성공에 대한 비정상적 욕망을 일으킬 수 있다(이 어려운 상황에서 성공할 수 있는 건 나 뿐이지 않을까?).
환자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을 때 의사들은 다양한 접근법을 시도한다. 어떤 사람은 본인의 설명을 처음부터 다시 하기도 한다. 거의 동일한 말을 한번 더 듣는 것만으로 환자들의 선택이 달라지는 것은 꽤 흥미롭다. 곰곰히 생각할 충분한 시간을 주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강하게 윽박지르기도 한다. 내가 수련 받던 병원의 신경외과 레지던트들은 응급실에 실려온 뇌출혈 환자의 보호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보호자분, 이건 선택할 것이 없습니다. 수술 안 하면 죽고, 수술 해도 죽을 수 있어요" 심지어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치료는 환자에게는 불가능하다거나, 이제는 우리나라에선 하지 않는 치료라는 식이다(이런 거짓된 시도는 여차하면 환자-의사관계를 영영 나락으로 보내버린다). 이러한 접근법들이 매번 통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환자와 적절한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환자의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있거나(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시간으로 심각한 출혈이 있을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충분한 정보 제공과 의견 교환"은 불가능하다. "자, 환자분은 3분 이내에 충분한 산소 공급이 되지 않으면 뇌손상이 시작될 겁니다. 지금부터 제 20분짜리 설득과 5분짜리 동의서 작성을 시작할게요"라고 할 것인가?
온갖 접근법을 동원한 뒤에도 환자가 명백하게 나쁜 결과가 예상되는 선택을 하고 있을때, 의사는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환자를 제지해야 할까? 아니면 환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할까? 국내의 몇몇 판결은 환자가 선택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설득하지 않은' 의료진의 잘못을 묻기도 했다. 그러나 환자의 의견을 무시한 치료는 더욱 막중한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환자와의 치료 결정 과정에서 나를 무겁게 압박하는 요소였다. 아툴 가완디는 그의 저서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에서 공포에 질려 치료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던 폐렴 환자의 사례를 언급한다. 선배의사는 그 환자가 호흡곤란으로 의식을 잃으며 본인의 의견을 표시하지 못하게 되자마자 잽싸게 기관삽관 및 인공호흡기 처치를 끝내버렸다. 그 환자는 회복 후 의료진을 질타하는 대신 감사를 표했다. 감동적인 일화이지만 과연 그 선택이 정의로웠는지는 모르겠다. 몇 십년간 점점 환자 중심으로 변위했던 의료의 흐름을 거슬러 다시 주도권을 의사가 쥐어야 할까? 안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나는 책임질 수 있을까? 환자는 스스로에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간혹 결정이 쉬울 때도 있다. 비밀을 말하자면, 설득되지 않는 환자의 굳건하고 잘못된 의지는 의사의 마음에 느슨한 안도감을 준다. 나는 할만큼 했어. 이 멍청한 선택은 환자의 책임이야! 그러나 잠깐의 안도감 뒤에 다시 몰려오는 서늘한 책임감에서 영영 벗어날 수는 없다. 정말 나는 할만큼 했을까?
비밀을 푸는 김에 한가지 더 솔직한 얘기를 하자. 환자를 대하며 내가 좀 부끄러워 하는 상황이 있다.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뜻대로 결정을 했는데, 내 예상과 달리 아주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때다. 내가 나쁜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좋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 좋은 일이지만 썩 민망한 일이기도 하다. 나는 권장되지 않는 치료가 무조건 나쁜 결과를 일으키지도, 권장되는 치료가 무조건 좋은 결과를 일으키지도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연약한 인간의 마음은 그 상황에서 말을 더듬고,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특히 환자가 의기양양해하면 더 그렇다. 내가 의사로서 조금 더 성장한다면, 편안한 마음으로 '좋은 선택을 하셨었네요, 저도 배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환자가 선택권을 나에게 완전히 일임하려 하는 것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세간의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환자들이 의사가 자신의 치료를 전적으로 결정해주길 원한다. 어떤 환자들은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특히 고령층의 환자들이 그렇다). 설명과 논의를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며, 심지어는 의사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소리지른다. 때로는 그들이 의사를 일종의 선지자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기 전에 군중들을 모아놓고 "제가 지금부터 막대기를 바다에 꽂을건데, 물이 갈라지는 원리는..."하고 떠들기를 바라지는 않을테니까. 그들은 내가 확신에 찬 말투로 "저는 최고의 의사입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제가 다 낫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길 기다린다. 의사인 환자나 보호자들조차 주치의에게 선택권을 넘길 때가 있다. 이는 아마 그들의 환자들이 잘못된 치료를 선택해 곤란했던 주관적 경험, 그리고 본인들의 의료 지식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결합된 결과일 것이다(당연하지만 의사들이라고 모든 과의 모든 질환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임'은 환자의 의식이 없을 때 더욱 강해지는데, 보호자는 책임질 수 없는 선택을 두려워하며, 의사가 선택에 대한 위험부담을 대신해주길 바란다.
이전에 말했듯 환자의 나쁜 선택이 그렇게 불만이고 문제라면, 전적으로 일임된 의사 결정권이 좋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내가 정말 위대한 의사이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남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이 오롯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두렵고 부담스럽다. 졸속한 나의 마음은 환자가 내 의견은 따라주되, 선택은 본인이 했다는 도장을 찍어주길 늘 바란다. 이것은 책임 회피이다. 그러나 내게도 변명은 있다. 의사의 책임 만큼이나 환자의 책임도 있는 것이 아닌가? 환자 역시 본인 몸의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스스로를 위해 적절한 선택을 해야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나한테 완전히 던져버리려 하다니, 당신들이야말로 직무 유기라고.
자동차 엔진이 고장나듯 멈춰버리는 환자도 있다. A씨는 50대 여성으로, 2일 전 발생한 돌발성 난청으로 병원에 내원했다. 그녀에게는 적절한 스테로이드 약물치료가 필요했다. 그러나 약물 치료의 의미와 부작용을 설명하자마자 그녀는 그 치료를 거부했다. 나는 약물치료 보다는 덜 선호되지만 적용 가능한 고실내주사 요법을 설명했다. 귀 안에 긴 바늘로 주사를 한다는 설명을 들은 그녀는 앞선 반응보다 더욱 더 극렬하게 그 치료를 거부했다. 세 번째 방법은 자연 회복을 기대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 역시 그녀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이제 내게는 더 이상의 패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A씨는 전원이 꺼진듯이 진료실의 의자에 앉아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죠?"
그녀는 내가 숨겨놓은 비장의 치료를 꺼내길 기다린 것이었을까? 이렇듯 옳은 결정인지 고민하기 전에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막혀 버리기도 한다.
환자와의 좋은 의사 결정 과정, 자기 결정권 보장에서 당연시되는 '충분한 정보 제공'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대부분의 환자들은 6년의 의대교육과 5년의 수련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를 포괄적, 다면적이 아닌 일차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이 수술의 이 부작용 가능성이 2-3% 가량 됩니다'라고 했을때 환자는 이를 높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낮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단순한 조영제 컴퓨터 단층 검사(CT)를 시행할 때도 동의서에는 조영제에 의한 낮은 확률의 부작용과 그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설명하게 되어 있다. 이 설명으로 인해 공포에 질린 환자가 꼭 필요한 CT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작용의 가능성을 일축하고(이는 어쩌면 최악의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검사를 진행해야 할까? 아니면 '나는 설명했고, 환자가 거부한거야'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악성 병변의 가능성이 높은 환자를 집으로 보내야할까? 과연 내가 환자에게 준 정보는 좋은 정보였을까?
의사들은 환자에게 적절한 정보와 의견을 제공하려고 시도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인식될지는 알 수 없다. 환자 개개인은 이 정보를 본인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의사를 의심하거나 스스로를 과한 낙관에 빠뜨린다. '증상 완화'는 어느새 '완치'의 의미로 잘못 이해된다. '매우 드문 부작용'은 '필연적인 위협'이 되고 '일시적인 정신과적 증상'은 '자살 약'이 된다. 의사를 피고인석에 세운 법정에서는 수많은 기계적 설명 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중 어떤 것이 의미있는 설명이고, 어떤 것이 불필요한 설명인지는 아무도 정해주지 않는다. 이렇게 오인된 정보들은 환자의 잘못된 선택을 유도한다. 환자가 자신의 오해를 드러내기라도 한다면 의사가 교정할 기회가 있지만, 매번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는 않는 것 같다.
인턴 시절, '연명 치료 거부'를 ‘안락사'와 같은 의미로 이해한 어느 보호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한 의사들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치며 중환자실을 떠났다. 환자는 그 중환자실에 남겨져 있었다.
이번엔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B씨는 무엇보다 의지가 되고 믿을 수 있는 의사를 원한다. 병에 걸린 상황이 두렵고, 의사가 그 상황에서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런데 그의 눈 앞의 의사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B씨는 이 수술에 대해 5분 전에 처음 들었는데, 이제는 이 수술을 받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어떤 치료 방법은 의사들끼리도 논쟁이 있다는데, 의사들도 결정할 수 없는 걸 그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왜 의사들은 그에게 선택권을 주려는 걸까?
B씨는 그저 잘 낫고 싶을 뿐이다. 의사가 늘어놓는 수많은 설명, 작성해야 하는 동의서들의 내용은 나를 위한 것보다는 본인의 책임을 어떻게든 피하려는 수작처럼 보인다. 사라진 의사들의 책임은 이제 그에게 넘겨진다.
다음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중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정기준(가공인물)과 창제자 세종의 대화다.
정기준: 정치는 오직 책임이야!
(중략)
정기준: 주상의 진심을 말해볼까? (문자를 통해) 백성과 권력을 나누려한다, 그리 말했느냐? 아니다. 주상의 속마음은 책임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세종: 난 백성을 사랑한다!
정기준: 아니, 귀찮은 것이야. 자, 글을 알았으니 이제 다 스스로 해결해라. 이러고도 불행하면 그건 다 네 놈들 책임이야. 이게 너의 본심이다!
어쩌면 의사들도, 환자가 귀찮아 진 것은 아닐까? 환자와 책임을 나누고, 이제 당신들이 선택했으니 스스로를 책임지라고 떠넘긴 것이 환자의 자기 결정권의 찬란한 이상 뒤에 숨은 그림자는 아닐까?
현대의학에서 환자가 해야할 일은 결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간호사 등 다른 의료인력과도 적절하게 소통해야 한다. 의사의 설명을 이해해야 하고 질문해야 한다. 정해진 일정대로 병원에 방문해 검사와 치료를 받고, 평소에도 의사의 지시대로 건강 관리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 예전에는 의료 접근 자체가 어려웠지만 이제는 수많은 의사 중 좋은 의사를 선택해야 할 책임도 주어진다. 이러한 수많은 책임에 소홀했다면 그 징벌은 당신의 건강을 향한다. 오늘날의 환자는 어쩌면 상태가 아니라 일종의 직업일지도 모른다.
현대의학의 이러한 변화는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한 것과 흡사하다. 과거에 이뤄지던 의료, 즉 의사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환자는 그대로 따라야만 하던 권위적 의료 모델을 Paternalistic Model(가부장적 모델)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한때는 의사가 수술여부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끔찍하게도 본인의 우생학적 관점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환자가 모르는 약을 처방했으며 환자들은 자신의 의무기록 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의무기록은 의사의 소유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고,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대신 부모(의사)의 책임 하에 보호를 받던 아이는 이제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성인이 되었다. 이 성장에는 아마 칸트의 영향을 받은 자율성에 대한 찬사, 건강권에 대한 인식과 권위주의에 대한 반성 등이 기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장의 댓가로 환자는 스스로에 대한 결정권이라는 무거운 선물을 받게 되었다.
<뿌리깊은 나무>의 마지막에서 세종은 백성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정기준에게 증명한다. 나는 현대 의료의 기저에도 환자와 의사에 대한 신뢰가 있다고 믿는다. 환자가 자신의 몸과 삶을 소중히 하고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 의사가 환자를 사랑하는 따뜻한 조언자로서 일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공유할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 위에서 바라보면 오늘 날 우리가 치료를 결정하는 과정은 매우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환자들이 그 신뢰에 부응하고 있는가? 그리고 의사들은 진정 환자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이렇게 보면 내가 환자와 함께 치료를 결정하는 것을 반대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낄수도 있겠다. 분명 나는 무조건적으로 환자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에 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몇 어려움과 결함들 속에서도 나는 공동의사결정 모델과 환자의 자결권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왜일까? 나는 '의사가 생각하는 최고의 치료'와 '환자를 위한 현명한 결정'이 다르다는걸 배웠기 때문이다.
이비인후과 의사로서의 경험은 환자의 삶에서 생명만이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비인후과는 인간의 오감 중 세 가지(후각, 청각, 미각)을 담당하며, 인간이 세상에 내놓는 표현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발성(목소리)를 담당한다. 이비인후과 환자들에는 빗소리를 듣지 못하는 음악가, 소금의 맛을 잃은 요리사,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된 달변가가 포함된다. 대부분은 질환에 의한 것이지만, 어떨 때는 수술이나 치료가 그 기능을 잃게 하기도 한다.
후두전절제술(Total laryngectomy)은 후두암 환자에게서 시행되는 수술인데, 나의 아내는 그 수술을 '인간이 신을 조롱하기 위해 만든 술식'같다고 표현했다. 수술 절차를 아주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후두(목소리를 내는 성대를 비롯한, 목의 아랫부분을 의미한다)에 생긴 암을 제거하기 위해 목을 크게 짼 후 후두 전체를 제거한다. 제거된 후두는 텅빈 부분으로 남게 되는데, 주변의 조직을 원통 모양으로 끌어모아서 새로운 기관(숨구멍)을 만들어 낸다. 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환자는 목에 뚫린 구멍으로 숨을 쉬게 되며 입은 오로지 음식을 먹는데만 사용되게 된다. 우울하게도 이 수술의 최종 결과 사진은 때때로 금연을 유도하기 위해 담배갑 포장지에 인쇄된다.
굉장히 끔찍하게 들리지만 어찌되었건 후두전절제술은 효과적이고 잘 정립된 수술이다. 그런데 이 수술은 큰 문제가 하나 있다. 목에 뚫린 구멍으로 숨을 쉬기 때문에 아주 특수한 방법을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목소리를 잃는 것이다. 후두전절제술은 환자의 후두를 절제할 뿐 아니라 그 삶에서 친구와의 일상적 대화, 흥얼거리던 노래와 사랑의 속삭임마저 도려내버린다. 이비인후과에서 일하면 목소리, 청각, 연하(삼킴) 등 사람의 머리와 목에 집중된 기능이 얼마나 삶의 질에서 필수적인 요소인지 강렬하게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목소리가 생명만큼이나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걸 배우게 된다. 다행히 후두전절제술보다 덜 효과적이지만 목소리를 보존할 수 있는 치료들이 존재한다. 의사와 환자는 이 치료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위험을 각오하고 목소리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안전하게 삶에서 목소리를 절제할 것인가?
모든 이의 저울마다 각자의 균형이 있다. 과거 유명 개그우먼의 충격적인 자살 사건의 뒤에는 그녀의 인생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피부 질환이 있었다. 누군가는 생명에 비하면 피부병은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의사가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어떤 것이 좋은 치료라고 결정하는 것은 그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는 재난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의사는 목소리와 생명을 자신이 아닌 환자의 양팔 저울에 올려 놓았을 때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 가늠해야 한다.
그런데 환자의 저울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만큼 어렵다. 어떤 의사들은 환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이야기 하는 것을 회피한다. 환자의 개인사를 자세히 알거나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도리어 올바른 의료를 제공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동료들도 있다. 나도 그들의 의견에 일부 동의한다. 사적인 관계로 인해 의사가 객관적인 견지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나는 그 관계에 휘말려 권장되지 않는 치료를 제시하거나, 적절한 과정을 건너 뛸 수도 있다. 위기의 순간에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일은 의사로서 피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나는 환자의 성격과 개인적 가치를 아는 것만큼은 정말 사적인 관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기준에 그것은 의사의 공적인 역할과 책임 내에 있다. 의사가 원한다고 환자가 자신을 쉽사리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의사는 항상 시간이 모자라고, 환자는 본심을 숨긴다. 어려운 의사 결정을 앞두고 환자들이 자주 묻는 것은 다른 환자들이 어떻게 선택했는지였다. 가장 개인적인 결정을 다수결에 의존하는 것이다. 어떤 환자들은 자신의 저울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이 어려움을 뚫고 환자에 대한 이해가 갖춰졌다면, 이제 의사는 환자에게 자신을 이해시켜야 한다. 이 치료가 어떤 의미인지, 내가 왜 이 부작용을 설명하는지. 내가 왜 당신에게 이러한 권유를 하는지. 의사의 의견은 심지어 환자 스스로의 결정보다 더 환자에게 적합할 수도 있다(의학적 적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사는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아 왔으며, 그 결과에 대한 경험도 더 풍부하다. 환자보다 덜 불안해하고, 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결정을 환자가 받아들이게 할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여전히 최종 결정권은 환자에게 남아 있다.
글을 이상론으로 끝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환자와의 의사 결정 과정의 문제점을 줄줄이 늘어놓고 나서, 근엄한 태도로 '그럼에도 환자를 위해 깊은 이해와 대화로 잘 결정 해야 한다~'라는 결론은 너무 낭만적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결정을 대신해줄까? 당신은 인공지능이 결정해 준 당신의 치료, 그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할아버지의 뇌에서 어느 날 교모세포종이 발견되었다. 얕은 의대생의 지식으로도 나는 그 뇌종양이 매우 치명적이고, 수술과 항암에도 재발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상당히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아버지와 친척들은 적극적 치료 대신 자연의 순리에 따르기로 하셨다. 할아버지는 행정가셨으며, 평생동안 신사이자 주당이셨다(이 두가지가 공존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 위암으로 수술을 받으셨고, 그 수술을 들어갈때까지만 해도 그때가 인생의 끝인 줄 알았다고 얘기하시곤 했다(할아버지는 위암 수술 후 수십년을 더 사셨다).
치료를 포기하고 할아버지가 입원하신 요양 병원의 간병인은 저렇게 점잖은 환자가 없다고 감탄했다. 이미 할아버지의 기억과 인지능력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대뇌피질에서 변연계까지, 하나씩 전등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할아버지 안의 신사는 단정하게, 그리고 천천히 쓰러지고 계셨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께 최고의 치료를 해드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머리를 열어 종양을 제거하고, 몇 번에 걸친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를 병행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셔서 증손자를 기다리고 계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런 희망찬 결과 대신 끝없는 재발, 항암방사선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인공호흡기나 비위관 등을 동반한 무의미한 연명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점잖은 환자 대신 수많은 관이 연결된 짐덩이 같은 몸, 그리고 그 몸에 간신히 매달린 나약해진 영혼과 마주해야 했을 수도 있다.
할아버지가 신사로 남을 수 있던 것은, 그를 잘 알고 함께 했던 가족들의 결정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여전히 그 선택이 좋은 선택이었는지, 나쁜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삶에 어울리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할아버지는 절규에 찬 고통 없이, 마치 밤을 지샌 모닥불에서 불씨가 천천히 사그라들듯 돌아가셨다. 투병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어느 화창한 날, 나는 버스 창문에 기대어 뒤늦게 눈물을 약간 흘렸다.
의학적 결정에 있어서 필연적 불완전함은 누구의 선택도 진정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환자가 결정하던, 의사가 결정하던, 심지어 신이 결정하더라도 그 선택은 완벽할 수 없다. 다만 옳다고 믿기로 의사와 환자가 약속한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 약속을 채우는 것은 진정한 대화와 이해 뿐이다. 의사로서 내가 제시하는 선택이 당신을 위한 선택임을 설득하는 것, 반대로 환자에게 어떤 가치가 중요한지 이해하고 그것이 의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 끝없는 여정에는 분명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다.
* 패혈증 : 전신에 걸친 세균 감염으로 신체의 여러 기관 및 조직에 염증이 발생하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