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못 마신다고 하면 알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그래도 한두 잔 정돈 하겠죠.'라고 되묻는다. 사실 한 잔은 어렵고 한 모금 정도 가능한데 맥주보다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신다면 기절할 확률이 높다.
마실 줄 알면서 마시지 않으면 절제미라도 있을 텐데 체질 때문에 못 마시니 술 얘기가 나오면 유아스러워 보여 겸연쩍다. 30대 때 알고 지내던 다소곳한 얼굴의 미자언니는 나도 잘 못 마셔라고 했지만 소주 1병쯤은 가볍게 비웠다. 취기를 모르면 인생을 반만 아는 거라며 불콰한 얼굴로 내게 술 좀 배워봐라 했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언니뿐인가. 이백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으뜸이 만취라던 바이런까지 작가 중에 술을 예찬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술만 마실 줄 알았다면 지금쯤 시를 12편 정도는 남겼을 텐데. 내가 글을 잘 못쓰는 것도 어쩌면 술을 마시지 못해서라고 아무도 안 웃는 농담을 해본다.
주량은 유전이란 말이 있던데 내 경우는 애매하다. 친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고 친구도 많아 거의 매일 술을 드셨다 한다. 아빠는 할아버지를 존경했다. 가난한 이웃에게 쌀 나눠주시고 거지에게 따뜻한 밥 지어 먹여 보내시는 할아버지의 박애정신을 으뜸으로 쳐 할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그 말을 하고 또 한다. 생각해 보면 새로 밥을 짓는 건 할머니가 했을텐데 할아버지는 남 듣기 좋은 말만 하셨다 생각하지만 아빠의 감상을 파괴하고 싶지 않아 속으로만 한다.
친구분들이 죽더라도 손은 두고 가라 했을 만큼 손재주가 좋으시고 명필이셨다 한다. 할아버지 필체를 닮지 못한 게 제일 안타깝다는 아빠는 악필이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결혼하시기 전에 돌아가셨는데 정확한 병명은 모르고 그저 술병이라고만 했다. 술이 뭔 죄가 있나. 건강을 해칠 만큼 마신 사람이 문제지. 하지만 아빠는 술이 할아버지를 잡아먹었다며 스스로 평생 술을 마시지 않겠다 선언했다. 아빠는 자신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나는 아빠가 술을 마시거나 술 냄새를 풍기거나 취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빠의 강한 결심이 유전자에 새겨진 건지 할아버지 손녀답지 않게 내 몸엔 알코올 분해 능력이 없다.
술이 체질에 맞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스무 살을 앞둔 겨울이었다. 학력고사를 본 며칠 뒤였는데 동갑내기 6개월 빠른 넷째 이모집 사촌언니가 광안리에 놀러 가자 옆구리를 찔렀다. 언니는 다 계획이 있었다. 거기서 마신 칵테일이 인생 첫 술이었다. 이름도 야했다. 키스 오브 파이어. 빨간색 술은 보기엔 이뻤는데 맛은 없었다. 내 입맛엔 꼭 로션에 설탕을 넣은 맛이었다. 참아가며 삼분의 일쯤 마셨는데 몸이 축축 늘어졌다. 독주라도 마신 듯 눈앞이 아득해지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처음엔 다 그렇다며 웃고 놀리던 언니가 점점 심각해지는 내 상태를 보고 놀랐다.
가소롭다 가소롭다 해도 이렇게 가소로운 주량은 처음 본 모양이었다. 그 꼴로 집에 들어갈 수 없어 해변가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이번엔 모래사장이 발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결국 해변가에 드러누웠다. 정신없는 나를 업고 끌고 데려와 술 취한 걸 숨기느라 언니가 된통 애를 먹었다. 언니가 나보고 넌 어디 가서 절대 술 마시지 마라 신신당부했다. 아, 내가 술이 체질에 안 맞는구나 라고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한 번으로 포기할 순 없었다. 술은 먹을수록 는다지 않는가. 그렇지, 처음부터 잘 먹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주제도 모르고 재도전했다. 선배와 친구들이 함께 한 자리였다. 소주를 한 잔 받아 삼분의 일쯤 마셨다. 어라, 기분이 좋아지네. 아, 이 맛에 술을 마시는구나. 내가 이제 술맛을 아는구나. 에헤라디야.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밤 열 시 육교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난간을 붙잡고 허리를 숙여 아래로 지나가는 자동차에 시비를 걸었다.
그 순간 뇌은 분명히 행동을 인지하고 있었다. 와 이카노, 이기 도랐나 하는 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는데 이상하게 멈춰지지 않았다. 술을 마시니까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게 필름 끊긴다는 거구나 싶었다. 소주 삼분의 일 잔 마시고 술병이 나 하루종일 드러누웠다. 거기다 육교 위에서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른 기억에 한동안 그날 만났던 선배와 친구들을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졸업 후 일 년 지나 결혼하고 3개월 후 첫애를 가졌으니 술 배우고 마실 기회가 없었다. 7년 지나 다시 일하게 되면서는 아예 처음부터 술을 마시지 못한다 말했다. 사실이기도 했고 혹시 회사 사람들 앞에서 쓰러지거나 육교에 올라가면 곤란하지 않은가. 일하고 사람을 만나다 보면 술을 먹지 못해 불편한 일이 더러 있다. 술을 한 잔 같이 해야 친해진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무슨 심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술을 먹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굳이 가르쳐주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런 일을 막아주는 이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술은 못 마셔도 술자리는 좋아한다는데 흥이 부족한지 나는 술자리도 별로 좋아하는 거 같지 않다.
엄마는 아빠가 술을 마시지 못해 고리타분하다 평했다. 나보곤 술도 마실 줄 아는 남자를 만나라 했는데 30년 같이 살지만 남편이 술 마실 줄 알아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 술 안 마시는 남편을 두면 마시는 남자가 좋아 보이고 술 마시는 남편을 두면 안 마시는 남자가 나아 보이는 법 아닌가 싶다.
남편은 퇴직 후 밖에서 술 마실 일이 줄어드니 저녁식사를 하며 반주를 한다. 그걸 보고 술 먹기 싫은데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신다 했던 말이 거짓인걸 알았다. 나는 내가 술을 싫어하니 저 사람도 고역이겠구나 했더니 웬걸,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부부끼리 한 잔 하는 게 로망이라기에 맥주에 콜라 섞고 소주에 사이다 섞어 마셨는데 한 모금 먹고 나면 들어가 누워야 하니 로망이고 뭐고 삼세번하고 때려쳤다.
영화 '소공녀'에서 미소는 집세 담뱃값 술값이 오르자 집을 포기한다. 그렇게 돈이 없으면 나 같으면 담배를 끊겠다 술 안 마시겠다 하는 비난 속에서 당당하게 위스키를 선택한다. 오늘 잘 곳이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라며 만사천 원 위스키 한 잔을 음미한다. 영화를 보며 저 술은 무슨 맛일까. 쟤도 로션맛일까 하는 나는 죽었다 깨도 맛볼 수 없는 감정이다. 집으로 은유되는 세상사람들의 욕망, 가치, 정상이라 여기는 삶을 벗어나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내가 절대로 포기 못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했다.
술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은 알 길 없고 이번 생은 술 없이 살아가야 한다. 술도 빚은 것이고 책도 누군가 빚은 것이니 술대신 책이나 실컷 보며 살자 위로한다. 고리타분한 인생이구나 싶지만 갖지 못한걸 갈애하면 번뇌한다. 술벗은 없지만 글벗은 있으니 다행이고 취기를 몰라 인생의 반밖에 모른다지만 사실 반만 모르면 다행 아닌가. 아침엔 글을 읽고 오후엔 골치 아픈 수학을 가르치고 저녁엔 개를 쓰다듬고 술은 못 마시고 살아간다. 알고 보면 그것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