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의 영을 경계하라!
작금의 언론과 매체를 보자면, 무속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범위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지만, 사실 무당은 예전부터 언제나 많았었고 무속(巫俗)은 변함없이 횡행해왔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1168~1241)는 조정의 음사금지령(淫祠禁止令)에 의해 근처의 무당이 개성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는데, 이 기쁨을 이기지 못한 그는 ‘노무편(老巫篇)’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인공지능 자율주행 택시가 등장하고, AI 비서를 고용(?)하기 시작하는 이 시대에, 지역마다 우후죽순 출몰하는 것은 물론 이전보다 공공연하게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무속은 ‘조상신’을 그 숭배와 교류의 원천으로 하고 있다. 조상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의 선조, 즉 보통 직계로 윗대에 돌아가신 분의 넋을 기본 바탕으로 하지만, 소위 제명을 다하지 못한 가족의 혼령이나 문무(文武)로 이름을 떨친 위인 등 그 대상이 광범위하다.
심지어 자연물이나 설화 속의 영적인 존재를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조상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은 아니지만 이번에 살펴볼 작품은 『어우야담(於于野談)』으로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조선의 문인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경험한 기괴한 일들을 직접 기록한 『묵호고(黙好稿)』이다.
성리학으로 인해 조선은 그 이전의 시대인 고려보다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기괴한 존재인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다. 만약 유교가 지배하는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서 혼령이 어쩌구, 귀신이 저쩌구 했다가는 매월당 김시습과 같이 평생 제도권 밖에서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기에, 야망이 있는 문인들은 초월적인 존재와 현상에 대해 의식은 하고 있으나, 관심이 없는 척 혹은 전혀 모르는 척을 하곤 했다. 유몽인 역시 공식 기록인 『어우야담』에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나 존재에 대해 언급할 수가 없어, 별도로 『묵호고』에 기록하게 되었고, 여기에는 유몽인의 첩 귀신, ‘애귀(愛鬼) 이야기’가 상세하게 적혀있다.
1618년 유몽인의 정실부인인 신 씨가 시름시름 폐병을 앓다가 죽었는데, 이름난 무당 ‘복동’은 유몽인의 첩 ‘오애개’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정부인 신 씨를 시기한 첩 애개가 신 씨의 침실 밖에 사람의 해골과 함께 저주의 글을 써서 묻어놓았던 것이다.
이주영, “『묵호고(黙好稿)』 소재 ‘애귀(愛鬼) 이야기’ 연구, 한국문학연구 64집, 2020 참고
유몽인은 혐의를 받고 있는 첩 애개와 집안 종의 아내인 애옥(愛玉)을 심문하고, 그들이 공범인 것을 확인한다. 다만 노비 애옥은 애개에게 뇌물을 받고 시키는대로 한 것뿐이라고 자백하여 결국 화살은 첩 애개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유몽인은 그 사이 달아나버린 애개를 하인들이 추격하게 하여,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만든다. 유교적 가치관으로 충만한 조선의 문인 유몽인에게 부인들간의 투기 내지 참소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갈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애개가 죽은 바로 그 다음날부터 일어난다. 애개의 귀신, 아니 귀신이 된 애개는 그 집으로 들어가 갖가지 악행을 저지르는데, 여종들이 귀신에 씌고 유몽인의 아들의 첩도 가위에 눌리며, 가축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애개의 괴롭힘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주영, “『묵호고(黙好稿)』 소재 ‘애귀(愛鬼) 이야기’ 연구, 한국문학연구 64집, 2020 참고
귀신이 된 애개가 집안을 풍비박산 내놓고 떠나갈 기미조차 없자, 당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유몽인은 오늘날의 ‘엄벌탄원서’에 해당하는 상소를 위와 같이 염라대왕과 열 명의 저승 왕(十王)에게 올리는데, 그제서야 애귀가 떨어질 수 있었다. 유몽인은 자신의 글솜씨가 염라대왕마저 감복시켰다며, 스스로를 뿌듯해 하였지만 이도 잠시, 이후 유몽인의 상황전개와 그 끝은 아주 좋지 않았다. 1623년 광해군의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로 인해 역모죄로 아들 유약(柳爚)과 함께 참수를 당하였다.
위 애귀 이야기를 기록한 지 약 2년 뒤의 일이었다.
이 밖에 『묵호고』에 기록된 전기적(傳奇的) 성격의 유사한 이야기들은 여럿 있다. 유몽인은 자신의 첩 애귀 사건을 경험하기 전에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고, 이에 관심도 없었지만 변고를 직접 겪고 나서 『묵호고』를 통해 영적인 존재와 사후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었다. 『묵호고』는 김시습의 『금오신화』와 같이 허구적으로 창조해낸 이야기가 아니다. 유몽인은 이 귀변(鬼變)에 관한 것이 모두 자신이 1618년~1621년에 직접 겪은 일이라 강조하여, 이 글은 체험담(필기)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깨달은 바를 가감없이 여실히 보여주기에 『묵호고』는 수필의 면모도 충만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다.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사건의 체험담은 유몽인의 『묵호고』 외에도 이륙(李陸, 1438~1498)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귀신체험담이라 할 수 있는 위 이야기들과는 달리, 유몽인의 『묵호고』 중에서도 이번에 살펴본 ‘애귀 이야기’는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친 체험담이라는 점과 영적인 세계에 대한 작가 유몽인의 의문과 혼란이 심도있게 녹아져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가 될 수 있다.
(이주영, “『묵호고(黙好稿)』 소재 ‘애귀(愛鬼) 이야기’ 연구, 한국문학연구 64집, 2020 참고)
무당이 활동하는 무속을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전기적 성격의 이야기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언제나 우리들의 흥미를 끌어왔다. 그런데 단순한 관심과 흥미를 넘어서 우리 인생의 운전대를 무당이나 그가 섬기는 귀신에 의탁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싶다. 개인을 벗어나 국가의 통치에까지 무속의 힘이 미치게 되면, 제정 러시아의 요승 라스푸틴이나 구한말 대한제국의 무당 진령군과 같이 종국에는 국가를 파멸로 이끌고 가는 간신들이 활개를 치게 된다. 개인에게도 일견 마음의 위로를 주거나 소원을 성취하게끔 해주는 것 같을지라도 그 마지막은 예외없이 파멸이라는 것이 필자의 진실된 외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