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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무 Apr 29. 2021

경계를 허물고 마구 침범해도 된다고

내 경계는 BOLD 하지 않을 수도 있어


(드라마 내용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요즘 꾸준하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이름은 <볼드타입>. 세 명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이 드라마에 계속 시선이 머무는 건 배경이 뉴욕이라서도 아니고, 패션 잡지사를 다뤄서도 아니다. 여성 셋이 지지고 볶고 다 하는 장면을 내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며 여성 정치인에 관한 글을 쓰고 싶지만 한 편으론 섹스에서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해 고민하는 것, 소위 '캐주얼한' 연애를 하고 싶지만 진심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 평생을 이성애자인 줄 알았는데 같은 성별에도 마음이 끌리고 마는 것, 열렬하게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다가도 미묘한 사람과 입 맞출 수 있는 것, 지금 있는 직장에 만족하고 안정적이라 느끼지만 모험을 감내해보는 것, 부양할 가족이 있어 높은 연봉을 직업 선택의 최우선 조건으로 여기다가도 결국 하고 싶은 일에 몸을 던지는 것. 내 모습이기도 하면서, 내 친구의 모습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내가 바라던 모습이기도 한 면면들이 선명했다.


더불어 주인공 셋은 그렇게 완벽하지도 않다. 개인사에 감정적으로 파묻혀 있다 상사에게 버럭 소리를 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한 나머지 친구에게 내 의견을 강요하고, 그런 친구에게 더 화를 내고, 친구와 같이 사는 집의 욕실에서 사귀는 사이도 아닌 남자와 섹스를 한다. 그렇지만 다투고 함께 있는 공간을 뛰쳐나가도 다음 날에 다시 모이고, 연인과 헤어진 뒤 허망한 표정으로 욕조에 몸을 담근 친구 옆에 나란히 앉아 술을 나눠 마시는 방식으로 위로를 한다.


나는 세 주인공이 서로 감정이 격해져 투닥거리고 난 다음 날, 절교라는 파국을 맞이하지 않는 장면이 신선했다. 세 친구들은 자주 다투지만 "내가 사고 쳤지?"라며 자신의 말실수를 곧바로 자각하고,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머쓱하더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웃고, 사과하고, 다시 잘 지낸다. 우리 우정 여전하냐고 물으면서. "여전하지?"라는 질문엔 사실 셋의 관계에 변화가 없으리란 걸 이미 알고 묻는 기색이 완연했다.


옛 친구들이 문득 떠올랐다.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자연스레 멀어진 이들도 있지만, 강렬한 끝맺음으로 정리된 우정도 더러 있다. 언제고 모르게 쌓인 서운함, 이해하기를 시도했으나 끝내 이해하지 못한 것들, 주저함과 망설임들이 뒤엉켜 관계를 끝내는데 일조했다. 그 친구들과 <볼드타입>의 세 여성처럼 투닥거려 봤다면, 왜 내 편을 들어주지 않냐고 화를 내고 다음 날 머쓱해하며 미안하다고 그래 봤다면, 그런 과정을 수차례 함께 겪어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까?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서운할 수 있다는 여지가 있다는 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거꾸로 솟는 수준의 일이 아니란 걸 표면으로 드러냈다면?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되는 우정이 있지 않았을까. 이미 지나간 인연은 지나간 것이고, 지나갔더라도 당시에 함께 나누었던 시간이 거짓되지 않았기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만약에"라는 말이 붙잡는 덜미가 늘 있다.


타인에게 서운하다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건, 나도 타인을 서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기 때문에 우린 같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내가 너를 서운하게 할 때가 있을 테니 네가 서운하게 굴어도 좀 참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지냈다. "사실은 너에게 기대하는 게 있었더. 근데 네가 그렇게 해주지 않아 좀 서운했어. 서운하다는 건 너와 멀어지고 싶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서 생기는 감정이야. 그러니 오해하지 말아 줄래?" 얼마든지 잘 이야기해볼 수 있었을 텐데.


부럽다. 벗은 몸으로 욕조에 함께 들어가 술을 나눠 마실 수 있는 헝클어짐이, 룸메이트인 친구가 남자와 입을 맞추며 집으로 들어왔을 때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끼고 흔쾌히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는 유쾌함이, 실직할 위기에 처한 친구에게 같이 내는 집세를 내가 마저 내고 있겠다는 호방함이, 혹은 내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하는 경계 없음이 나는 많이 부럽다.


나는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 경계를 넘나들 수 있을까? 아니면 내 경계를 먼저 허물어볼 수 있을까. 오늘 싸웠더라도 내일의 해가 다시 떴을 때 우리의 우정이 여전히 견고하다는 걸 확신하며 웃고, 또 새로운 하루의 일상을 공유하며 잘 지낼 수 있을까. 


싸움이 두렵지 않았으면 좋겠다. 싸우게 된다면 건강하게 잘 싸우고 싶다. 서운한 감정이 들 때, 우리의 우정이 멀어질 수도 있다는 비장한 마음의 준비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경계를 허물어보고 싶다. 허물어진 경계 사이에 드러나는 솔직한 날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게 서로를 향한 더 깊은 이해로 가닿았으면 좋겠다. 



Because my pain is your 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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