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선물인가요?
카카오톡, 인스타그램과 같은 네트워킹 도구들은 일대일로 직접 교류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뭘 먹고, 입고, 하며 사는 지 스크롤 몇 번만 하면 손쉽게 볼 수 있고 심지어는 경조사조차 물어보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 이렇게나 친절한 덕분에 알고 지내는 사람 간에 최소한의 도리도 할 수 있고 말이다.
특히 카카오톡에 있는 '선물하기' 기능은 '아는 사이' 정도로 규정된 이에게 생일 축하를 할 때 요긴하게 사용 가능한 수단이다. 축하를 안 하고 넘어가자니 종종 얼굴을 마주칠 일이 있어 무안할까 고민스럽고, 진지하게 선물을 고르자니 그 정도로는 우정이 깊지 않아 오히려 민망한 상황이 그려지는 애매한 사람에게 메세지로 선물을 전하기에 이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가 이야기한 중용의 미덕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카카오톡은 좀 더 나아가 '위시리스트' 기능도 마련했다. 이 위시리스트는 내가 '갖고' 싶은 게 아니라 '받고' 싶은 걸 지정해두는 목록의 총합이다. 선물을 보내야 할 일이 있는데, 마침 상대방이 위시리스트를 꽉꽉 채워놨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적당한 선물을 골라 보내고 그럴싸한 추임새까지 더 곁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물을 뭘 할까 고민 많이 했는데,
마침 위시리스트에 이게 있더라고!
이왕이면 갖고 싶은 걸 가지는게 좋으니까~
생일 축하해 ^^"
특히 기프티콘을 보내는 행위는 내게 우정의 크기가 서로 균일할 것이라는 확신이 불투명 할 때 생길 수 있는 뻘쭘함과 서운함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좋은 도구였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기프티콘을 보내주었는지도 기록에 남기 때문에 화답하기에도 참 적절한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아는 사이' 정도에서만 카카오톡으로 선물을 주고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절친한 이들에게 빠르게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카카오톡만큼 쉽고 빠르게 선물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까? 특히나 비대면을 강조하는 근래에는 오히려 카카오톡으로 선물을 보내는 게 권장사항이 될 수도 있다.
쓰라고 만들어 준 이 기능을 그냥 별 생각않고 쓰면 될 것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관계를 품을 수 있는 총량이 크지 않은데 이와 상충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어 골머리를 앓았던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늘 받고싶어했다.
손가락 열 개, 좀 더 보태서는 발가락 열 개까지 다 꼽아 스물 내외 정도의 친구들도 내게 과분하다 느꼈다. 어쩔때는 이 친구들만으로도 남은 생을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학교도 다니고, 회사도 다니며 세상 안에서 움직이다 보니 사적인 관계보다 어느 정도의 가면이 필요한 사회적 관계의 연결고리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얼마 안되는 내 관계의 총량에 '아는 사이'를 넣어두는 것이 과식을 한 것마냥 체기가 느껴지고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이 자주 생겨났다.
관계값의 최대치가 스물정도밖에 안되면서 서른, 마흔, 쉰의 '아는' 사람들에게까지 따뜻한 사람이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나를 경청하는 사람, 마음이 넓고 관대한 사람, 온정적이며 안정적인 사람이라는 역할을 취하게 했다.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해 보이는 사람에겐 내 어깨를 내주겠다 했고, 마음이 비어보이는 사람에겐 내 마음을 내어주겠다 했다.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 생일이라는 알람이 뜨면 평소엔 전하지 못했던 말이라는 수식을 붙여 최선을 다해 단어를 고르고 골라 축하 메시지를 실어 날랐다. 기프티콘과 함께.
사람들은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얘기해주었다. 마음이 넓고 관대하고, 온정적이며 안정적이라고. 나는 나를 규정하는 말을 빠짐없이 주워 담아 간직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객관적이고 정확할 거라는 뿌연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실제로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욕망에 충실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나에게도 트인 귀가 있고, 넓은 마음의 구석이 있고, 한없이 관대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내가 마냥 그러기만한 사람일까? 스스로가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인간상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흐뭇하다가도, 때로는 겉잡을 수 없는 자괴감에 휩싸이곤 했다. 불안하고 예민하여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있는 나, 어쩔 때는 단칼에 마음의 문을 닫고 등을 돌리곤 하는 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나. 이런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닌 걸까.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욕망은 어느 연애가 끝나고 난 뒤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너'와 '나' 사이에 오로지 우리 둘만 존재했다면 헤어짐은 너의 부재로만 괴로웠을 것이고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겹치는 인간 관계가 너무 많았다. 같이 아는 사람이 여럿인 사람과 이별한다는 것은 너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도 이별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그때는 미처 잘 알지 못했다.
우리 둘 사이에 겹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만남을 지속하는 동안에는 서로의 세계를 확장할 기회가 되어주었으나, 헤어지고나니 그것만큼 후회되고 괴로운 일이 없었다. 왜 사람들이 CC나 사내연애를 하지 말라고 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우리가 만났다가 헤어진 걸 알고 있는 사람들, 특히 너와 가까운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은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너를 마주치는 것만큼 괴롭고 무안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욕망이 드글드글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들이 나를 안 좋게 볼 거라는 생각이 이별로 이미 조각난 마음을 더 잘게 찢어놓기도 했다. 나와도 맺은 관계의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와 더 가깝고 친하다는 이유로 나의 인간관계가 허물어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연애 상대를 잃었다고 다른 관계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노력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졌다는 사실이 나의 개별적인 인간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절대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지독하다 싶을만큼 사람들간에 파생되는 만남의 자리에 참석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안부를 물어오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다 만났다. 여러 사람들이 흘려주는 조언을 스펀지처럼 쭉쭉 흡수했다. 오해가 생기고 어색해지는 게 싫어 안간힘을 썼다. 상처를 헤집을 수 있는대로 헤집어야 곪은 부분을 정직하게 치료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헤어진 상대를 마주쳐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나가 자리를 지켰다.
꽤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였다. 그 해에 사람들과 함께했던 사진이나 영상을 틀어주는 시간이 있었다. 초 단위로 휙, 지나가는 사진들 중 하나에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편안히 웃고 있는 내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만났던 이와 함께 나온 사진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이렇게 모르는 사이가 되어 있을 줄은 상상을 못하고 있던 저때의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좌절된 꿈같아 화장실에서 후두둑 눈물을 쏟아냈다. 화장이 번졌고, 그걸 수습하겠다고 얼굴을 문질러 울고난 티가 안 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헤어진 이에게 울고난 얼굴을 보이기가 싫어 고개를 숙이고 옆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내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 날 나는 얼굴을 가리고 헤어진 이를 지나쳤다는 이유로 '헤어진 사람이 꼴보기 싫어 티가 나게 시야를 가리고 다니는 무례한 사람'으로 해석되었다.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았을텐데, 누가 그렇게 말했는 지도 알게 되었다.
당신과 나는 서로 인간적인 호감을 주고 받았고, 우호적인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를 축하했고, 세심하게 고려했다는 티가 제법 나는 선물을 나눈 적도 있었다. 상식적인 선에서 내가 인성이 나쁘지는 않다는 이해가 당신에게 너무 당연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과 더 친해질 수 있는 여지를 나는 제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찰나의 내 행동으로 나에 대한 해석을 참 쉽게 했다.
당신 덕분에 잘 알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본다. 내가 울고 난 티가 역력한 얼굴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면? 그건 그거대로 나에 대한 당신의 다른 해석을 이끌어냈을 것이다.
'너를 적당히 좋아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에 해당하는 많은 행위 목록이 있다. 달력에 굳이 생일임을 적어둘 정도는 아니지만, 카카오톡 알림에 뜨면 기프티콘 하나 정도는 보내주는 것. 카페모카나 프라푸치노를 보낼까 싶다가 몇 천 원을 아껴 아메리카노로 화답하는 것. 뻐근하게 삐걱대며 어설픈 웃음 정도만 교류하는 관계의 톱니바퀴를 잘 굴리기 위한 기름칠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사실 애초에 조립도 잘 안되있었던거지, 기름칠만 잘 해두면 언제고 굴러갈 준비가 되어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공식을 그제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메리카노든, 몇 천 원을 더 보탠 프라푸치노든 맛있게 먹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기프티콘을 보내고 싶다. "밥 한 끼 먹자"는 말을 막연한 인삿말로 건네지 않고 구체적인 일정 수립과 실행으로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이들에게 기프티콘을 보내고 싶다. 지친 일상에 잠깐 숨 돌릴 틈을 줄 커피 한 잔, 사무실 책상 한 켠의 종합비타민, 배고픈 아침의 훈제계란, 으슬하니 감기 기운이 있을때는 쌍화탕으로. 그렇게 적재적소에 내 마음이 전송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