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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무 Dec 02. 2021

나는 사랑을 믿기엔 글렀나 봐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를 보고



영화를 보고 한참을 불어 터진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영화 초반에 일어나는 사고, 개연성 없이 사고 직후 등장하는 피아노 한 대. 이걸 무슨 논리로 이해해야 하나? 인상을 잔뜩 쓰고 있다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뒷덜미를 잡혀 십여 년 전 고등학생 때를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남녀공학이었으나 모종의 보수적인 이유들로 성별이 섞이지 않은 분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봄이 저물어가고 여름이 막 시작되려던 때의 체육 수업 시간으로 기억한다. 수행평가로 공 던지기를 몇 차례 한 뒤 수돗가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조금 먼 거리에서 낮은 톤의 왁자지껄한 음성이 섞여 귀에 들어왔다. 같은 시간에 체육 수업을 하는 남자 반 애들이겠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 무의식에 반응한 내 시선의 끝에 그 애가 있었다. 주변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그 애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수롭지 않게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그땐 그렇게 끝이었다.


이상했다. 


그날 체육 수업 시간 이후로 그 애가 자꾸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그 애가 몇 반인지 알게 되었다. 서투르게 몸을 굴리는 게 싫어 피로감만 잔뜩 느꼈던 체육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반 애들이 운동장 아닌 다른 곳에서 수업을 하면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애는 전교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이 되었다. 내 눈에만 띄는 게 아닌 사람이 되었다. 알아서 이곳저곳에 출몰해주니 일부러 그 애를 보려는 애를 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 애는 이과, 나는 문과로 학년이 올라간다고 한들 도무지 접점이 생길 재간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드물게 기회가 왔다. 모의고사 성적이 잘 나와서 무려 '심화반'에 편성이 되어 별도의 보충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성적도 좋았던 그 애는 이미 거기 있었다.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공부 잘하는' 무리에 속한 것도 흐뭇했지만, 그 애가 있어서도 좋았다. 수업과 수업 틈 사이 엎드려 쪽잠을 청하던 나를 깨워 내가 깜빡하고 잊은 무언가를 챙겨준 것도 그 애였다. 당시 교지 편집부장이었던 내게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있다며 따로 연락이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만인의 사람다운 친절과 할 법한 질문들을 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나빠봤자 뭐 얼마나 나빴겠냐만 당시 얼레벌레 설레던 나를 위해 나쁘게 보자면, 유죄다. 사귀지도 않을 거면 다정하게 굴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참. 어쨌거나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내 그 애를 마음에 두고 지냈다. 졸업을 하고 자연스레 물리적인 거리가 생겼고, 그 애가 재수를 한다는 소식을 건네 들었다. 자연스레 그 애에 대한 마음도 차곡차곡 접혔다. 슬프거나 아쉽거나 한 마음은 없었다. 그 애는 제법 괜찮았던 애라 덕분에 그 애를 좋아했던 시간이 때 묻지 않을 수 있었다.


지난 기억에서 다시 현재로 생각의 흐름이 돌아왔다. 노트북 화면을 줄곧 노려보았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이 영화의 문법이 유별나게 불친절한 걸까? 갑작스러운 차 사고는 뭐고, 뒤이어 나타난 오르간인지 피아노인지 그건 대체 뭔지. 왜 그런 걸 목격하고도 배리는 일상에 전혀 타격이 없는 건지. 아니, 사고 장면을 목격해 놓고도 그건 일절 신경 쓰지 않으면서 도로에 덩그러니 버려진 피아노는 왜 갑자기 사무실에 주워다 놓는 거냐고. 사무실 바깥부터 눈에 띄게. 그것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말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감정은 논리적인 흐름을 가질 수가 없다. 갑자기 난데없이 일어난 차 사고, 갑자기 시야에 나타난 피아노. 커다란 충돌을 목도했지만 그게 내 것이 아닌 줄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내 몫의 충격도 있었다는 것. 느닷없이 내 앞에 나타나 어느 부분이든지 꼭 내 시야에 걸리고야 마는 것. 이 모든 것을 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까? 그냥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거부는 애초에 선택지에 없는 거였다. 사고가 있었고, 피아노가 갑자기 배리 앞에 나타났다. 배리는 갑자기 일어난 사고처럼, 영문을 모르게 등장한 피아노처럼 다가오는 레나와 사랑에 빠졌다. 배리의 시선에 너무 예쁜 나머지 얼굴을 뭉개버리고 싶은 욕구가 들 정도의 마음이다.


나도 어째서 그 애가 내 시야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설명할 도리가 없다. 앞으로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 애에게 시선을 붙잡혀 있던 때를 해맑은 감정이라 기억하면서도, 이제는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감정은 재난이라고 여긴다. 누군가를 만지거나 껴안고 싶고 뺨을 깨물고 싶어질 때, 위험을 고려하느라 오롯이 그 감정의 영역에 내 몸을 던질 수가 없게 되었다. '누군가'는 안전한 사람인가? 무엇으로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까?


폰섹스 회사에 겁도 없이 신용카드 번호와 집 주소 같은 민감한 개인정보를 대수롭지 않게 알려주고, 함께 식사를 하던 중 급작스레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물을 파손하고 나오는 사람이라면? 영화적 장치로 구성되었을 배리가 가진 성격의 극적인 부분들이 못내 불편했다. 레나에게 묻고 싶었다. 거울에 꽂힌 주먹이 자신에게 꽂힐 수도 있는 걱정은 혹시 안 해봤느냐고.


상상해본다. 내 앞에 갑자기 멈춘 차 한 대가 낡은 피아노를 버리고 가는 상황을.

나는 대형 폐기물을 스티커도 안 붙이고 배출했냐며 피아노를 버린 사람들을 욕하느라 바빴을 거다.

피아노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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