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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무 Mar 05. 2021

구원하는 글쓰기

나는 왜 쓰기로 결심했는가

방 정리를 하며 물건을 치우다 보면 손놀림이 더뎌지는 순간이 꼭 한 번씩 온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편지 상자 들추는 일은 왜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얼굴과 이름은 뚜렷하지만 닿아있던 인연의 단면은 닳아 이제는 무용(無用)해진 사람들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읽고 폐기하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상자의 맨 밑바닥에 깔려있던 편지 한 통이 눈에 띄었다. 널뛰는 사춘기 열병의 투병기를 절절하게 서로 나누던 친구의 편지였다.



"작가 연봉이 40만 원도 안 된다더라. 그렇지만 그 꿈을 꾸는 너를 응원해!"



어쩌다 저런 액수가 산출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확성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기로 하자. 편지를 주고 받던 애들은 중학교 2학년 아니면 3학년이었다.


해가 진 뒤 고요한 시간에 송출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위안이 되어주던 시기가 있었다. 고등학생 때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가는 버스에서 매일 라디오를 들었다. 무심코 잠이 든 날에는 자장가가 되어주기도 했다. 저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대본을 쓰는 작가가 되면 좋겠다 싶었는데 방송작가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비좁은 가능성에 나를 구겨넣을 자신이 없어 빠르게 포기를 했다.


그렇지만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계속 단념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십 대 후반의 무렵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찰나의 감정을 모아두었다 폭발시키는 형태의 글쓰기를 했다. 속이 답답하면 블로그 창을 열고 작자도, 독자로 오로지 나 하나뿐인 글을 썼다. 불안과 분노에 짓이겨진 날엔 일부러 대상도 사건도 뭉개버려 알아볼 수 없게 글을 쓰기도 했다. 시간이 지난 뒤 이 글을 읽었을 때 이 모든 감정이 희미해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두서없이 펜을 휘갈기고 키보드를 두들겨 대곤했다.


그렇게 두서없는 글쓰기의 두서없음에 허우적거리다 하나의 단서를 찾게 되었다. 대학에서 인류학이라는 전공을 만나게 되었고, 푹 빠졌다. 인류학이 알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언가'였다. 통계와 수치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가 관찰자이자 참여자가 되어 현장에서 같이 호흡할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경계가 없는 참여자로,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있는 관찰자의 시선에서 최대한을 보여줄 수 있는 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틀이 정해져 있는 기계적인 글쓰기에 가깝기도 했다. 학술적 글쓰기에는 어느 정도 방법과 유형이 정형화되어 있으니 말이다. 전공 수업이 곧 인류학적 글쓰기를 훈련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고, 공부가 재미있다 느꼈고, 학회를 쫓아다니고 논문을 읽어대며 쾌감을 느꼈다.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나댔다. 저도 인류학자 하고 싶어요.


마지막 학기에 '생애과정의 인류학'이라는 수업을 수강했다. 매 수업마다 주어진 주제에 대한 인류학적인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야 했다. 수강생들은 매 주 주제에 대해 A4 1~2장 분량의 쪽글을 제출했고, 쪽글 내용을 바탕으로 수업 시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 부지런히 책상 배치를 원형으로 만들었다. 교수와 수강생이 둥그렇게 앉아 서로 시선이 닿는 자리에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이거 심리학과에서 하는 집단상담치료 같은 것 아냐?" 웃을 일도 아닌데 괜히 다른 전공을 들먹이며 웃었다.


그런데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니,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시시각각의 내 기분과 감정을 토해내는 글쓰기는 어렵지 않았는데, '나'를 내가 관찰해서 글을 쓰려니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꿈, 컴플렉스, 가족, 사랑, 죽기전에 떠올리고 싶은 기억 등 주제가 다양했는데 나를 관통하는 건 전부 '가족'이라는 단 한 가지였다. 당시의 나는 꿈은 '가족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고 컴플렉스는 '대다수가 애틋하게 여기는 가족이라는 대상을 나는 그렇게 여기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썼다. 글을 쓰며 속이 많이 쓰렸던 기억이 난다. 가족에 대해 느끼는 불편감은 그냥 이따금씩 느끼고 말면 되는 기분으로 남기고 싶었다. 자진해서 괴로움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시엔 그런 불편감이 흩어지기는 커녕, 어딘가 켜켜이 쌓이고 있다는 건 몰랐다. 글쓰기가 고여있는 묵은 감정을 해소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걸 깨달은 건 수업의 시수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난 이후였다. 괴로운 주제로 글도 써야 하는데, 이야기도 해야하는 게 곤욕스러웠다. 나의 우물이 너무 깊다는 생각에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는데, 용감한 사람들 몇몇이 자신의 이야기를 덜컥 꺼내기 시작했다.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이래도 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용기에 힘입어 나도 입을 열 수 있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건 학과, 학번, 이름 정도였다. 공강시간에 무얼 하는지, 떡볶이 먹는 걸 좋아하는지, 도서관에서 시간 죽이며 있는 게 좋은지, 아님 학교를 배회하며 있는게 좋은지 그런 사소한 특성 같은 걸 알 턱이 없는 사이였다. 그렇게 사적인 시간을 공유해본 적 없는 이가 대부분인 수업에서 오히려 가까운 이들에겐 해본 적 없을 이야기를 다들 잘도 풀어놓았다. 어떤 이야기는 그 무게가 상당해 하루종일 마음을 짓누를 때도 있었다. 나의 우물만 깊어 물을 길어올리기 힘든 줄 알았더니 나보다 더 멀고 깊은 우물을 가진 이도 있었고, 우물터만 있어 길어올릴 물이 없는 이도 있었다.


물이 없으면 물이 넉넉한 사람이 길어다 주었고, 길어올릴 물이 없는 이에겐 우물을 파주었다. 아는 건 학과, 학번, 이름에 불과한 사이들끼리 털어놓는 이야기로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쌓였다. 타인의 불행에 기대는 종류는 결코 아니었다. 사람들 삶의 면면이 각기 다르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데서 오는 안도감이랄까? 우리 모두에겐 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있구나, 그 무게를 다들 이렇게 안고 지고 살고 있다는데서 오는 동질감이 생겼다. 꼭 같은 일을 겪지 않아도 공감과 이해가 가능하다는 걸 체득했다. 그때부턴 나에 대해 글쓰는 걸 마냥 두려운 일로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가족을 주제로 기말 보고서를 쓸 땐 내가 왜 그렇게 가족에게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얽매여있는지 제법 괜찮은 분석도 시도해볼 수 있었다. 어두운 우물 안에서 건져 올려진 해방감을 만끽했다.


수업의 종료와 함께 대학의 마지막 학기도 끝이 났다. 인류학은 아니지만, 대학원에 진학했고 동시에 보고서 쓸 일이 많은 직업인으로의 생활을 했기에 쓰는 행위를 멈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전히 마음으로 내켜 하는 글쓰기를 멈춘지는 오래였다. 그러다 우연히 오랜 기간 구독중이던 인스타그램 친구가 글쓰기 마감 동료를 모집한다고 했고, 덜컥 하고 싶다고 메세지를 보냈다. 당시 나는 만나던 사람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아 상실감에 깨어있는 시간이 고통 범벅이었기에 뭐라도 하며 시간을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글쓰기의 굴레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모임의 이름은 마감의 기쁨과 슬픔(이하 '마기슬')이다. 규칙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 써서 내는 것이었다. 규칙에 맞게 자발적으로 내 기록을 적립하는 것에만 의의를 두고 시작한 모임이다. 읽히지 않아도 괜찮다고, 써낸 것만으로 다 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모임에 참여한 이들이 자발적인 독자가 되어 서로의 글에 '읽기'라는 행위를 동반해주었다. 매 주 깊은 우물에서 조금씩 길어 올려지는 경험을 또 하고 있다. 각자의 감상을 달아주는 적극적인 읽기 행위를 통해 우리의 글은 각기 다른 힘을 지니게 되었다. 글은 읽혀야 한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건 이름 또는 필명, 인스타그램 계정 정도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사회에 뛰어든 이후에도 여전히 떡볶이 먹는 걸 좋아하는지, 카페에서는 커피를 시키는지 아니면 커피 아닌 음료를 좋아하는지, 소주인지 소맥인지 맥주인지, 아니면 아무 음주 취향도 아닌지, 그런 사소한 특성 같은 걸 알 턱이 없는 사이다.


그렇지만 곧 알게 될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표정과 목소리를 나누고 있진 않지만, 글을 맞대고 표정과 목소리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마감의 기쁨과 슬픔]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weeklymagam/

- 장그린은 마기슬 인스타그램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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