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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로 Nov 09. 2020

스타벅스맛 나는 맥심커피

이 글은 달력과 코코아 또는 커피와 함께하면 더욱 좋다.

 이제는 낡디 낡은 큼직한 흰색 머그잔에 어머니께 추석선물로 들어온 고급스러운 느낌의 코코아 파우더를 한 스푼 떠서 넣고, 뜨거운 물로 그 속을 가득 채운다. 정수기의 뜨거운 물 자동 출수 버튼을 두 번 연속해서 누르고, 얇은 티스푼으로 휙-휙- 머그잔 안을 저으면 이내 얕은 코코아 향이 부엌에 살며시 번지기 시작한다. 이미 뜨거워진 잔을 조심스럽게 들고 방으로 향하던 길에, 퇴근 후 방에서 쉬시던 어머니가 나와서 물으신다. “글 쓰는 건 잘 되니?” 피곤한 상태에 피곤한 말투인 채로 나에게 이런 물음을 전하실 때의 목적은 뻔하다. 그리고 그냥 평범하게 ‘잘 됩니다’라고 얘기하면 끝나는 대화에, 나는 굳이 첨언을 한다. “글 쓰는 게 잘 되고 말고 가 어딨어요, 돈 받고 글 쓰고 있는 상황도 아닌데.” 이 시대의 참 아들이 따로 없다. 생활비도 내지 않고 있는 주제에 뭐가 그리 당당한지 모르겠지만 말은 멈춰지지 않는다. “요즘 삶의 계획들을 다시금 점검하고 있는 상황이라 머릿속이 복잡한데, 어머니의 그런 얘기까지 들으면 더 힘들어져요.”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냥 어머니의 불안감을 조금만 덜어드리면 끝나는 것이었는데, 내가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네가 뭐가 잘 된다고 한 적이 있었니, 알아서 해라.”라는 말과 함께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으셨다. 닫힌 방문 같은 답답함이 가슴속에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이내 손에 들고 있는 머그컵이 뜨거웠다는 것을 깨닫는다. 방금 전 까지는 코코아 향이 짙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아무 향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다시 앉는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만 같았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모르겠다. 어머니가 나의 미래를 모르시겠다고 하신 것만큼이나 나도 나의 미래를 모르겠다. 내가 오늘 잠을 잘 자지 못했어서 부정적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먹고살기 위해 한다고 하는 일들 중 뚜렷한 성과를 보이는 것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크게 열정적으로 임하지 않고 있는 본인에 대한 혐오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모니터 앞에 엎드려 울지도 짜증 내지도 표정을 구기 지도 않고, 그냥 무표정으로 눈을 뜬 채 가만히 있게 된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보니 문득 코코아를 타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머그컵에는 ‘스타벅스맛 나는 맥심커피’ 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현재는 대기업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스타트업이었던 한 기업의 CEO에게 강의를 들었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대학교 2, 3학년 정도가 되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한강변에서 벌어진 축제였는데 가수들의 공연과 연사들의 강연이 합쳐진 행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작가의 삶의 여정을 듣다가, 이름 모를 인디가수의 연주를 들으며 감탄하고, 좋아하는 기업가의 성공기를 들으며 삶의 목표를 되새기고, 유명한 연예인의 거침없는 드립을 들으며 웃으며 마무리하는 그런 류의 특이한 축제였다. 나는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던 한 배달어플을 제작한 기업의 CEO에게 강의를 듣게 되었다. 이미 7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기에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딱 두 가지 기억기 나는 것이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처음으로 질문을 한 덕분에 눈 앞에 있는 저 머그컵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 두 번째는 그가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 사용했던 방법이다. 정말 별거 아닌 것 같은 방법이라 느껴졌는데, 생각하고 보니 나는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던 방법이다. 실행이 어렵지도 않고, 효과는 그 정도 성공한 사람이 확신의 찬 말투로 찬사 했을 정도니 두말할 필요 없을 것 같다. 다만, 단지 그때에는 내가 정말 별 것 아닌 것이라 생각해 무심코 그 묘책을 무시했던 것 같다. 방법은 단순하다. 1. 본인 눈 앞에 달력을 가져온다. 달력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달력 주제에 뭐가 이렇게 비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디자인이나 그려진 캐릭터들이 너무 예뻐서 구매할 수 박에 없었던 달력도 좋고, 모 한방병원에서 침술 서비스를 열두 차례 받은 대가로 보내준 듯한 달력도 괜찮고, 예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넘기는 달력도 물론 괜찮다. 그리고 2. 그 달력에 오늘 날짜에 X표를 친다. 그냥 표시만 남겨도 괜찮고, X표와 함께 아무 멘트나 추가해도 괜찮다. 예를 들어서 운동했음이나 공부했음 같이 단순한 것도 괜찮으며, 나 오늘 기분 안 좋았음 같은 필자가 오늘 쓸 예정인 내용을 담은 한 줄짜리 일기도 괜찮다. 이후에 이어지는 마지막 과정이 핵심인데, 3. 그 과정을 ‘100일’ 동안 반복한다. 만약 처음부터 100일을 해내는 게 힘들게 느껴진다면 처음에는 10일이나 30일같이 짧은 기간을 설정해도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X표만을 쳐서 달력을 채워나가더라도, 결국 그 기간 동안 그 일을 해내는 것이다. 그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분께서. 난 아직 못해봤으니까 아는 척은 굳이 안 하련다. 


 이렇게 한 바퀴의 성공을 겪고 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확실하고 매력적 -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껴진다. 그래, 나는 갈대 같은 사람이다. - 이다. 사실 이 과정은 누가 보았을 때는 별거 아닌 작은 일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일’을 본인이 ‘정한’ 기간 동안 성실하게 수행했다는 점에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다음은 발전이다. 처음에 X표만으로 10일을 달성했다면 이후에는 50일 100일 단위로 늘려가면 되고, X표 대신 글을 썼다, 공부했다, 운동했다 등의 표시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본인이 달성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을 고려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1단계를 어떻게든 마치는 경험을 해냈다면 2단계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그때 내가 얻었던 성공한 사업가의 성공하기 위한 방법들 중 한 가지였다. 당시에는 특별한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를 무시하고 금세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것 같은데, 뜬금없이 이때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레카라고 외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ㅇㄹㅋ’ 정도의 깨달음을 얻고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직까지도 어떻게 나의 삶이 흘러가게 될지는 모르겠다. 때때로만 확신하고 자주 불안한 것이 나의 삶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한참 동안이나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앞에 흰색 머그잔에는 아직도 코코아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코코아는 어느새 식어버린 상태였다. 다 쓴 글을 한번 쓱 훑어보는 과정에서 미지근한 코코아를 한 껏 마신다. 이제는 커피를 한 잔 더 타 와야 할 것 같다. 모 한방병원의 달력은 이미 눈앞에 준비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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