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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로 Nov 19. 2021

작년을 보내며

뒤늦은 결산

- 이맘때임 연말정산 시즌에 늘 폭발하는 홈텍스 홈페이지처럼, 머리속이 한참을 혼란스러워서 이제야 작년을 보내려 한다.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던(X) 있어야만했던(O) 한 해 였기에, 기록을 남기는 일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 아쉬운점 : 그만 둔 후, 3년간 지친 몸과 마음을 이제 좀 회복해서 오랜만에 해외 여행이라도 떠나려고 마음먹으니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일하던 친구가 나와같이 새로운 방향성을 찾기 위해 돌아왔고, 자연스럽게 해외여행은 포기하게 되었다.


- 그 와중에 잘한 점 : 그렇다고 마냥 놀지 않고 평소 마음의 부채가 있던 자격증에 도전했다. 한국사 1급, TESAT(경제학 자격증) 1급을 사실상 무료(환급반 활용)로 취득했다. 한국사시험 바로 다음주가 TESAT시험이라 좀 빡셌는데, 이렇게 안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 다음 시험부터 줄줄이 취소되더라.

*꿀TMI - 인강 수강시 환급반은 기적적인 제도다. 정확히는 가난한 대학생들을 겨냥한 제도이긴 한데...


- 그리고 나서 : 회사생활을 돌아보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그리고 스마트스토어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하고싶던 공부들 읽고싶던 책들을 10년만에 돌아온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준 집밥을 먹듯이 해치워 나갔다. 아, 주식도 이때쯤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 올해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익히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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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과 몸이 바쁠때는 누군가에게 여유를 줄 수 없음이 독이 되었는데, 막상 여유가 생기니 이 또한 다른 차원의 독이 되더라. 치사의 주체만 달라졌을 뿐이랄까. 다만, 치사 수준이 아닌 수준의 독은 언제나 필요하다 생각한다. 즉, 어떤 쪽이든 내성이 필요하다.


- 뇌에서 신체적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 통각은 사실상 같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런것일까 마음이 안좋을때는 신체를 올바르게 가누지 못하는 까닭은. 어제까지 인바디 점수 90점을 받던 몸뚱아리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 덕분에 근력없이 형태만 존재하는 눈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 때로는 차라리 신체적 가해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제발 정신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반반씩만 나눠서 주었으면 한다. 아, 이건 다른쪽으로 위험한 생각인가. 사족을 덧대자면 마조히즘은 필자의 취향이 결코 아니다. 그냥 후자 쪽이 견디기 더 쉬울뿐이다.


- 덧붙여, 단순히 몸이 좋아서 건강해보이는 사람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더욱 희귀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둘 다 해당되지 않는게 현대인이란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너무나 슬프다. 한 방향의 건강 정도는 갖게끔 해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게 난 지난히도 슬퍼왔었고, 작년 동안 한쪽 눈으로 흐르는 눈물만은 간신히 닦아왔다.


- 그래, 헬스장은 참 열심히 다녔다. 하루에 3시간 + 주에 5-6회를 다녔으니 말이다. 근데 식단관리를 대충하니까 몸은 참 안늘더라, PT를 받아야하나 고민했지만 그 분야에 쏟을 여유돈은 없다. 어쨌든 내 생애 가장 좋은 몸상태인건 맞다. 근데, 여전히 좋아하는 음식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마치 특정 음식에 대한 식욕은 구멍뚫린 항아리 같아서 한번 가득 채워놓은다 해도 어느새 다시 비어가는 것 같다. 근데 더 문제는 난 그런 항아리가 너무 많다.


- 난 누구나 좋아하는 치킨, 중식, 족발 및 보쌈은 당연히 좋아하고, 여성분들이 많이 좋아하는 엽떡, 닭발, 오돌뼈 등도 좋아하며, 주로 남성들의 소울푸드인 국밥, 돈까스, 제육 등의 음식도 좋아한다. 도대체 내가 싫어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 아, 두부를 싫어한다. 근데 꾸준히 싫어한다고 말하고 오다보니 내가 정말 싫어하는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들러 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떤 음식을 싫어한다'라는 항목을 채우고 과시하기 위해서 '두부'를 억지로 끌어들인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태까지는 프로이트식으로 '초등학교 2학년 남원 여행 당시 두부 음식을 억지로 먹다가 토했던 기억이 있어서 트라우마가 생겼다'말했었는데, 올해부터는 아들러식이 추가되었다.


- 자 다시 돌아와서, 적정수준의 마음과 몸의 여유 그리고 이를 능동적으로 조절해나갈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것이 행복의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 몸의 여유는 생각보다 조절이 쉽다. 그냥 서로의 상태와 일정 정도만 잘 알고 있고, '알려고 한다'면 어렵지 않게 맞혀갈 수 있다. 여기까지는 기계적인 영역이다. 2x2 루빅스큐브를 맞히는 정도 수준이라고나 할까. '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해서 19금이 아니고, 9금 정도의 영역이다.


- 마음의 여유가 문제다. 혼자있을때의 마음의 여유를 찾는것도 어려운데, 특정 상대방이 개입한다면 더욱더 혼란스러운 상황이 왕왕 발생하곤 한다. 마음의 여유를 조율해나갈만한 상대를 만나는 것이 첫 번째 문제요, 그 상대방이 그 조율을 받아줄만한 사람인지가 두 번째 문제, 끝없이 검증이 필요하며 이 검증을 서로 번거롭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야 한다는게 세 번째 문제이다. 말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적정수준에서 타협을 보곤 하는 것 같다.


- 그리고 언급은 안했지만 이 두 가지 여유와 더불어서 외적인 취향 또한 중요할 것이다. 아, 여기까지 생각을 하다보면 사람만나는 일이 쉽지가 않다는 게 실감이 난다.


- 사람을 만나갈 수록 세밀해지는 취향을 느끼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적확해짐'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차라리, '난 예쁜사람이 좋아'라고 말하는 이가 얼마나 순수하고 편견없는 사람인지를 수 차례 깨닫는다. 예쁨에도 수 가지 기준이 존재할 것이고, 어떤이는 그 기준 중 일부가 충족이 안된다 하여 관계의 시작을 망설일 것이다. 누가 봐도 그냥 '예쁜사람'이어도 말이다. (*남성기준에서 작성되었으나, 성별무관)


-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린 늘 누군가를 만나왔고, 만나고 있고, 반드시 또 만나게 될 것이다.


- 연애를 끽해야 한두번 경험해봤을 무렵에는 누군가와 헤어지는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열렬한 마음의 쏟음에 이어지는 이별에서 얻을 수 있는 아픔에는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고통들을 굳이 물성화시켜본다면 아마 온 세상의 기괴한 형상들을 다 모아놓은 형태가 될 것이다. 만화가 이토준지도 두 손 들고 물러날 수준이 분명할 것이다.


- 이러한 아픔에는 헤어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일단 몇가지로 추려보고자 한다. 첫 번째, 한 사람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공허함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음이 무서움. 두 번째, 난 이 사람 보다 좋은사람(이라고 말하고 실상은 그냥 잘나 '보이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세 번째, 연애 자체를 다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그 지리한 모든 과정을 다시 겪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마지막이다.


- 자 다행이도, 세 번째는 나이를 한살 두살 먹으며 연애를 지속하면 어렵지 않게 사라진다. 그리고 두 번째 또한 흐릿해진지 오래이다. 본인이 성장해나간다면 결코 후퇴는 없을것(*주로 저에게 전하는 응원입니다)이다. 그런데 말이다. 첫 번째 무서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더라. 그 색은 대부분 검은색을 띄고 있지만 그 채도와 구체적인 색상은 상대에 따라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한 관계가 끝나는 순간 그 가상의 막은 나를 뒤덮는다. 그 순간만큼은 유출된 기름에 힘겨워하는 한 마리의 바닷새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 그리고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바닷새가 되었었다. 갖지 못한 날개속으로 어두움이 치밀어오는것을 느꼈으나, 이내 그 침잠에서 벗어날 수 있을것이라 믿으며 견뎌왔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다가오는 것 같았던 도움의 손길은 나의 날개를 반대로 뒤집을 뿐이었고, 단지 그쪽에도 빠짐없이 검정을 칠하기 위했을 뿐이었다.


- 때로는 근거리에 있는 사람이 더욱 무섭다. 우리나라는 총기허용 국가가 아니기에 칼로 비유를 하자면, 멀리있는 사람이 나를 칼로 찌르려 할때는 최소한 '아, 나를 찌르려 다가오는구나 젠장 어쩌지?'라는 생각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와 바로 5m이내(친밀하니까)의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주머니에서 핸드폰 꺼내듯이 꺼낸 칼에 질리는 경우에는 어떨까? '아, 나ㄹ'까지 정도만 발음을 해내고 상대를 동그랗게 쳐다볼 수 있을 뿐일것이다. 카이사르의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언이 아직까지 회자되는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바닷새가 되기도 싫고, 카이사르가 되기도 싫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되지 않는 방법도 분명히 알고 있다. 예전에 되어봤을때부터 안되는 방법을 쭉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근데, 공부로 되지 않는게 있는것 같다. 나는 2010학년도 수능을 망쳤기 때문에 그때 기준으로 계속 공부해왔으나, 작년은 2021수능이 치뤄진 해였다. 이론과 실전에 범용이 필요하다. 아, 너무 어렵다.


- 그러나 늘 또 해낼것이다. 학습과 경험 그리고 반성이 뒷받침 된다면 말이다. 그래, 이건 일종의 서간문이자 반성문이기도 하다.


- 많은 이들이 여유를 찾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아, 구체적으로는 내 주변 사람 그리고 이 글을 진심으로 읽어 준 사람만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난 이기적인 사람이다. 죽을때까지 내 사람들만을 지키며 살아갈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이 마음을 먹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오히려 행복의 총량은 증가할 것이다. 애매하게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기보단 너! 너! 너! 가 행복하길 바란다 라고 말하는게 더 그들에게는 좋은일이라 생각한다. 암튼 행복은 그렇고, 다들 올 한해 아프지 마시라. 이정도는 기원해드릴 수 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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