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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피자 Jan 29. 2022

기꺼이 맛보는 기분

 점심시간, 간단히 도시락을 먹고 회사 주변을 슬렁슬렁 걸었다. 원래 항상 식후 산책을 했는데 요즘은 좀처럼 사무실 밖을 나서고 싶지 않았다. 내 자리의 전기방석은 나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뜨끈뜨끈함으로 나를 붙들어맸고 그 덕에 나는 걷는 즐거움을 마지못해 포기해야 했다. 어쩌겠어, 가지 말라는데. 헛소리다. 너무 추워서 나가기 귀찮았다. 그날은 아침부터 눈이 와서, 눈을 맞고 싶어서, 전기방석을 뿌리치고 오랜만에 나섰다.


 얼마 전부터 혼자만의 재미있는 놀이에 몰두해 있다. 어떤 노래를 플레이리스트 안의 '많이 들은 순' 상위권에 올리는 것이다. 그 노래는 몇 년 전에 열심히 챙겨본 어느 드라마의 OST인데, 한창 열심히 듣다가 언제부턴가 소홀해진 곡이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 노래에 다시 꽂혔다. 나는 마음에 드는 노래 한 곡만 무한으로 반복해 듣는 걸 아주 좋아하는데, 그런 식으로 듣다 보니 많이 들은 순 저 맨 밑에 있던 그 노래가 점점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참에 그 노래를 1등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어졌다.


 출근길에 포슬포슬  내리던 눈이 언제 잦아든 건지 점심 산책 길엔 거의 내리는  마는  했다. 내심 서운했다. 아침처럼 내리면 좋을 텐데 하는 속내를 들으며 무심히 발을 옮겼다. 날이 흐릿했고, 패딩 점퍼 틈새로 들어오는 공기가 찼다. 좋아하는 노래는   없이 반복에  반복 중이었다. 부연 하늘 탓인지  공기 때문인지 몰아치는 노래 때문인지 나는 문득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 자신이  기분에 잠기는  기꺼워한다는  알았다. 나는 내가 울적함을 너무도 미워해서  그것을 떨쳐내려 한다 믿었기 때문에,  자각이 조금 놀라웠다. 이 울고 싶은 기분을 계속 맛보고 있어도 싫지 않다고, 어쩌면 이건 꽤 맛 좋은 기분이라고.


 

 올해 꼭 이루고 싶은 두 가지 '이'가 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작년에 이루지 못해서 올해로 이어진 것들인데, 하나는 '이직', 또 하나는 '이사'이다. 올해는 꼭 하고 말리라, 라고 생각한 게 이미 작년이었고, 작년에 못 한 걸 올해는 할 수 있으려나 벌써부터 자신감이 꺾이려 하지만, 이번엔 진짜야 라고 스스로 세뇌하듯 거의 매일 같이 누른다, 직방다방직방네이버부동산또다방직방다방. 몇 가지 고정이 되어 있는데, 정해진 예산에 맞는 보증금이라든가 방 개수와 같은 조건들이 그렇다. 그리고, 지역도. 지금 살고 있는 집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로 살펴보고 있다. 이 동네가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 저렴하기 때문임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실은 이곳을 별로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주말엔 혼자 목적지도 없이 아무렇게나 산보를 한다. 하지만 목적지가 없다곤 해도 왠지 마음이 가는 방향이 있다. 즉흥을 이정표 삼아 발걸음을 뗀다. 아무래도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자꾸 나를 과거로 데려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어릴 적 자주 갔던 문방구로, 이제는 없어진 단골 슈퍼마켓으로, 옛날 옛적 외갓집이 있던 곳으로, 엄마와 자주 걷던 산책길로, 엄마랑 둘이 살았던 낡은 빌라가 있던 동네로. 추억에 취약한 나는, 그곳들을 스치며 속절없이 그 기분에 빠진다, 그러니까, 울고 싶은 기분에. 내 의지로 울고 싶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건 아주 고통스럽지만은 않아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아프고 씁쓸하고 우울하다. 나는 그 울고 싶어지는 기분에 나를 통째로 빠뜨린다. 그러다가 울게 되면, 운다. 어차피 울고 싶었으니까. 나는 직감한다. 앞으로 남은 생에 몇 차례의 이사가 있을지는 몰라도, 아마 계속 이 언저리에 매이게 될 거라는 걸. 이 주변을 수시로 맴돌고 맴돌면서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나를 사로잡길 원하니까. 언제든. 언제라도.


 울고 싶은   좋은 기분이라고 생각한다니, 남몰래 떠올린 생각에 남몰래 부끄러워남몰래 낯이  뜨거워지는  같았다. 대충 산책을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창피함과는 별개로  표현이  와닿았던 건지,  이후로 울고 싶어지는 마음이 올라올 때면 어떤 상상을 한다. 마치 아주 시면서 달콤한 사탕을  안에서 데굴데굴 데굴데굴 굴려 먹듯  기분을 기꺼이 맛보는 상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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