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먼 성묫길
(세상에서 가장 먼 성묫길)
중국의 시 중에 ‘달은 고향의 것이 더 밝네.’라는 시가 있다. “모든 사람은 고향이 있고, 고향마다 달이 있지만 사람들이 고향의 달만 사랑한다.” 지금은 랴오닝성의 진저우 지역을 달리고 있다. 중국의 하늘에도 달이 휘영청 떠오르는데 고향의 달이 그립다.
작년 추석에 이어 올 추석도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이 애틋하다. 그러나 지금 마음속에 보름달처럼 꽉 차오르는 꿈을 안고 달리는 발걸음엔 힘이 붙는다. 좀 늦어지겠지만 이 길은 난생처음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가는 세상에서 가장 먼 성묫길이다. 나는 자금 1만 5천km를 달려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가는 길이다.
아시럽 대륙의 어느 나라도 추석과 비슷한 명절은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각별한 추석은 없다. 그 속에 유교적인 전통이 어우러진 조상과 가족, 마을 공동체, 고향의 끈끈한 연이 녹아있다. 그 추석날 모두들 즐거워하지만 마음이 아파오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실향민들이다.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 작은아버지들의 아픔을 지켜보면서 자라며 슬픔을 물려받았다. 잠시 이별인 줄 알았던 핏줄을 영영 보지 못하는 아픔을 안 당해본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천만 이산가족이 멈춘 기억 속에 고향을 가슴에 안고 살다 한을 안고 다 돌아가시고 7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산가족 대부분이 고령인 점을 고려하면 늦었지만 남북 모두의 큰 결단이 절실하다.
중국의 중추절은 단오절, 청명절, 춘절과 함께 4대 전통명절이다. 월요일이지만 공휴일이라 아침의 거리는 한산하고 공원에는 모여서 기공 체조하는 사람들과 수십 명의 아주머니들이 무지갯빛 부채를 들고 군무를 추는 모습과 둥그렇게 둘러서서 제기차기 모습이 정겹다. 자주 보는 모습이지만 이 사람들 제기 차는 발기술이 대단하다. 발을 앞발 뒷발 다 사용해서 제기를 차는 모습이 마치 무술영화의 신공 같기도 하다. 이렇게 발재간들이 좋은 사람들이 왜 축구에서는 공한증에 떠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이다.
추석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우리나라에 송편이 있다면 중국에는 월병이 있다. 영어로는 Moon cake이라 부르는 것이다. 보름달 모양으로 둥근 빵에 돼지기름, 설탕, 달걀, 호도, 밤 등 견과류를 넣어서 만들어 중추절이 되면 보름달에 이 빵을 바쳐 가족의 행운과 안녕을 비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월병은 중추절에 가장 많이 주고받는 선물이고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고 한다.
월병의 역사는 은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 장건이 비단길을 열고 서역으로부터 호두와 깨가 들어오면서 그것을 월병 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호두로 만든 월병을 호병(胡餠)이라고 불렀다. 중추절 밤 당 현종이 달을 보며 양귀비와 호병을 먹다가 호병의 호(胡)자가 오랑캐 호자를 연상시킨다고 투덜거린다.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보름달의 정취에 젖어있던 양귀비는 자신도 모르게 ‘월병’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호병이 월병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중국의 중추절은 달구경이나 가을 잔치의 개념이지만 우리의 추석은 대동제의 성격이 강하다. 월병은 꽉 찬 보름달과 같고 송편은 반달과 같다. 보름달은 기울어갈 것이고 반달은 차츰 커져서 만월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미래지향적이었다. 이제 그리도 오랜 세월 꽉 찬 보름달이 되고픈 우리가 바야흐로 통일을 이루어 꽉 찬 보름달 같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세계를 향한 대동제를 신명나게 펼쳐나갈 때이다.
전설의 궁수 예는 옥황상제의 명으로 아름다운 아내 항아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온다. 예가 물의 신 하백의 아내와 불륜에 빠진 것을 안 항아는 불사약을 먹고 달로 도망친다. 불사약은 예가 서왕모를 찾아가 얻어 온 것으로 둘이 나눠 먹으면 불로불사할 것이고 한 사람이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한다. 항아는 이 불사약을 예가 없는 틈을 타 훔쳐 먹고 달로 도망친다.
달에는 토끼 한 마리와 계수나무 한 그루가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땅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달나라에 토끼와 함께 두꺼비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 항아가 아름다움을 잃고 두꺼비로 변했다는 것이다. 2007년 중국이 최초로 발사한 달 탐사선의 이름은 ‘항아’였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추석을 맞아 한국의 극장가에서는 ‘안시성’이라는 영화가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하는 것 같다. 안시성은 내가 지금 지나는 후루다오와 진저우를 조금 더 가면 랴오닝성 하이청(海城)의 동남쪽에 있는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당나라군은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을 함락했다. 당군은 이제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성과가 없자 당 태종 이세민은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 성으로 쉽게 넘어가려 했다. 60여 일 만에 토산이 완성되었는데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고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병사들이 새벽에 기습 공격해 토산을 점령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당나라 보급을 맡은 수군이 풍랑을 만나 몰살당하는 상황에 이르자 88일 만에 이세민은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양만춘장군이 추격하다가 당 태종의 눈에 화살을 정확하게 박았다.
이 지역이 옛 고구려의 땅이었거니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이 부근에는 석유시추공이 수없이 보인다. 갑자기 배가 아파진다. 신라가 외세의 힘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고구려의 그 드넓은 땅이 우리 영토에서 빠져나가면서 반도 안에 갇히게 되었고 그나마도 분단되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으니 천추의 한이 될 일이었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곳은 요동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채호는 그의 <조선사 연구초>에서 하이청 부근을 고평양(古平壤), 즉 고조선의 옛 수도라고 지목했다. 고평양이니 고조선이니 하는 말 앞에 ‘고(古)’자가 붙은 것은 후의 평양,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학자들이 붙인 말일 것이니 이곳에 진짜 우리의 평양이 있었고 조선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니 이 일대가 고구려의 중심지였다. 광개토대왕이 전장을 누비면서 확장한 영토는 서쪽으로는 베이징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오늘날의 몽골을 지나 러시아의 영토인 네르친스크를 지난 곳까지 뻗어 나갔으며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우수리스크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업적은 정복왕 알렉산드로스와 비견될만했다.
네르친스크에서 조금만 더 가면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는 바이칼 호수가 있다. 아마도 광개토대왕은 내친김에 그곳까지 병합하려 달려가다 3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북부여에 살던 해모수의 아들 주몽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이고 그곳에 살던 북방 민족이 ‘구리’ ‘고리’ ‘구려’ 등으로 기록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최남선도 나라의 운명이 백천간두에 섰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알기 위해서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알아야 했다.”고 하면서 바이칼의 알혼섬 일대를 답사하지 않았는가?
나는 가끔 내 안에 광개토대왕 유전자가 있어 ‘만주벌판을 달리는 꿈을 꾸었나?’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지금 그의 위엄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는 39세에 전장에서 요절했고 나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그보다 더 넓은 대지를 내 두 발로 달려왔다. 뿌리를 찾아 나선 그의 땀과 그의 말의 땀방울이 떨어졌을 이 땅 위에 나의 땀을 섞으며 할아버지 묘소에 성묘하러 가고 있다.
개인적인 성묫길에서 처음 시작한 평화마라톤이었다. 그것이 ‘남북평화통일’과 ‘세계평화’라는 슬로건을 더했다. 다시 한 번 고백하지만 나는 통일열사로 교육받거나 거창한 사상이나 이념 같은 것 없다. 더군다나 평화운동가로 내 인생의 목표로 삼은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내 체력이란 것도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되어 시작할 때 나는 나 자신도 이렇게까지 거뜬하게 달려올지 의심했었다.
그러나 개인사는 언제나 국가의 역사에 탯줄을 대고 있다.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아는 일은 통일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이유이다. 나와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많아서 뜨거운 관심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열사니 초인이니 이런 말로 오글거리지 않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를 갈라놓는 휴전선은 소위 말하는 비무장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빨갱이’라고 말하는 입술에 있고,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눈총에 있고, 가슴 섬뜩한 날카로운 말촉에 있다. 철조망은 외세 의존 사대주의에 있고, 불평등에, 고착화된 편견에 있다. 무의식 깊숙이까지 그어진 이 땅 곳곳에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심지어 친구들끼리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에도 그 벽은 높았다.
70여 년간 남북 무장군인 백만여 명이 철통같이 지켜낸, 안시성보다도 더 견고한 저 휴전선을 뚫고서 성묘 갈 길은 도저히 없었다. 그래서 1만5천 km나 되는 우회로를 생각해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성묫길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북평화통일’이니 ‘세계평화’란 간판을 도용했다. 그러니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죗값을 단단히 치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힘들게 먼 길을 오는 동안 기적같이 평화가 내 길동무를 해주었다. 평화가 내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어 행진하여주었다.
내가 성묘를 다녀오고 또 누군가가 성묘를 다녀올 수 있다면, 추석 하루만이라도 성묫길을 열어준다면. 그 길은 성묫길이 되고, 그 길은 수학여행 길이 되고, 또 신혼 여행길이었다가 자유 왕래 길이 될 것이니 내가 ‘남북평화통일’이니 ‘세계평화’란 간판을 도용한 것을 나무라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허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평화운동가로 행세를 하더라도 크게 나무라지 말고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다. 다만 열사니 초인이니 이런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피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국의 동해안 길을 따라 달리는 길에 가을바람이 넉넉해서 달리기에 더없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