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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Sep 17. 2021

피렌체1

르네상스 이전

고대부터 프랑크 왕국 시대까지

 피렌체의 역사는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시작됐다. 기원전 7-6세기경 고대 에트루리아인들 일부가 아르노강 유역 오늘날의 피에솔레 Fiesole와 피렌체 주변 지역에 정착하면서 도시가 생겨났고 특히 강변에 더욱 가까운 정착촌은 '꽃의 땅'을 뜻하는 플로렌티아 Florentia라고 불리며 도시 피렌체의 발원지가 됐다. 기원전 59년,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자인 로마는 여러 동맹 부족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며 제국으로 나가는 기반을 다지는데 에트루리아인들도 이때 정식으로 국가 로마에 편입된다. 로마제국 시절 피렌체는 퇴역 군단병들이 주로 정착하는 지방도시로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을 거듭했고, 제정 후기 기독교 확산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미니아토 성인(San Miniato. 서기 250년 순교)이 활동한 토스카나 지역의 선교 중심지로 부상하기도 했다. 덕분에 피렌체는 기독교가 공인된 직후부터 주교좌 도시로 지정돼 높은 종교적 위상을 누릴 수 있었다.

로마시대 피렌체(플로렌티아) 시가지를 복원한 모형. 규모를 짐작할 수 있도록 팔라초 베끼오의 실루엣을 세워 놓았다 (출처:위키피디아)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피렌체는 다른 토스카나 도시들과 함께 비잔틴 제국과 동고트 왕(테오도릭, 토틸라)의 세력 각축장이 돼 여러 차례 점령과 약탈의 혼란을 겪었다. 이후 북이탈리아를 장악한 롬바르드 왕국의 일부가 됐으며(서기 570년), 토스카나의 중심 도시 자리는 루카 Lucca에게 내주었지만 8세기 말까지 상대적인 안정을 누리면서 경제와 인구가 회복되는 시기를 맞는다.


  8세기 후반, 프랑크족의 왕 샤를 마뉴가 롬바르드족을 제압하고 중북부 이탈리아의 새 주인이 됐다. 825년 해적들이 아르노강을 거슬러 올라와 주변 지역을 약탈하자 프랑크 제국은 토스카나 지역에 새로운 관할 구역을 편성하고 백작(토스카나 변경백)을 임명해 통치와 방어를 위임하는데, 토스카나 백경백들은 인근 피에졸레와 피렌체를 통합해(854년) 지역의 새로운 중심도시로 삼았다. 피렌체는 프랑크 제국이 셋으로 분열(846년)된 뒤 혼란과 분열이 가장 심했던 중 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됐으나 왕국 다른 지역들과 달리 토스카나 변경백들의 통치 하에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공화국 초기(12세기)

 1115년,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의 분쟁(카노사의 굴욕)에서 교황을 적극 지원했던 여백작 마틸다 Matilde di Canossa가 사망하자 토스카나 변경백 가문은 사실상 대가 끊겼다. 마틸다는 죽기 전 투시아Tuscia 후작 귀도 궤라 Guido Guerra 2세를 양자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다수의 토스카나 도시들은 궤라의 지배를 거부하며 자치를 선언한다. 피렌체 역시 최초의 위원회 구성(1125년)을 시작으로 자치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 결과 1170년 경에는 독자적인 공화정 체제를 정착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형성된 초기 공화국 정부는 2개월 임기의 집정관(console) 2인이 행정을 지휘하고 150인으로 구성된 "선인들"의 자문회가 이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분기마다 한 번씩 열리는 시민들의 민회가 정책의 중요 사안을 승인하거나 감시하는 형식으로 운영됐다.


 변경백 가문이 사라지자 성문 밖 주변 농촌 지역을 지배하던 여러 봉건 영주 가문들이 피렌체 시내에 거점을 두고 자치 정부의 실권 장악을 위한 경쟁에 뛰어드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흥 도시 귀족들과 대상인 집안들까지 가세하면서 공화국의 권력 투쟁은 점점 복잡하고 치열한 양상을 띄게 된다.

 

농촌에 기반을 둔 봉건 영주가 시정에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공화국자신의 영지를 편입시킨 경우도 많았으나 사실 그 반대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 편입에 저항하는 주변 농촌 지역에 대해 피렌체 정부는 경우에 따라 무력 정복도 꺼리지 않았다. 특히 12세기에는 도시 동쪽의 아르노강 상류 지역(발다르노 Valdarno)을 장악하는 데 힘쓰는 한편, 토스카나 내륙두 강자 루카와 시에나 Siena에 맞서기 위해 피사와 손을 잡았다. 바다로 나가는 항구를 가진 피사와 아르노강의 내륙 수운으로 연결된 피렌체의 협력은 토스카나를 가로지르는 상업망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12세기 피렌체에서는 상업, 수공업의 성장과 함께 은행업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부유한 상인 계층이 등장했다. 또한 다음 2, 3세기 동안 피렌체 경제와 정치 활동의 주역이 되는 길드도 이 시기에 출현한다(1182년).

토스카나 지도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분열: 13세기

 13세기에도 피렌체의 공격적인 영역 확장은 계속됐다. 동쪽으로는 여러 요새를 건설하며 발다르노 지역의 장악을 강화하고 남쪽에서는 세미폰테 Semifonte 주변  엘사강 유역(Valdelsa) 일부를 차지하여 시에나로 향하는 프란치제나 가도1)의 몇몇 요충 구간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이 때부터 아레초, 시에나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두 도시와의 분쟁도 잦아진다.


 경제적 발전과 도시 규모의 성장도 눈부신 시기였다. 노동 집약 산업인 양모와 피혁 가공업이 발달하며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고, 부유한 상인들이 크게 늘어나 시정에 적극 참여하면서 차츰 전통 귀족 가문들과 나란히 도시의 실질적인 지배 계급으로 올라섰다. 이전 세기 후반 처음 등장한 길드 체제는 13세기 초 이미 완전히 확립돼, 총 21개의 길드가 피렌체의 경제를 주도했다.


 그러나 경제적 번영과 영토 확장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의 내부 정치는 불안정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황당(Guelf)과 황제당(Ghibelline)의 대립이었다.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전역의 도시들을 휩쓸게 되는 이 당쟁은 피렌체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우베르티 Uberti 가문 주도로 일어난 두 차례의 실패한 정변(1177/1193년)을 시작으로 주로 장원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 봉건 귀족들이 신성로마황제의 정치적 지배를 지지하며 황제당을 자처하자 이에 맞서 다수 신흥 도시 귀족과 부유한 상인 계층은 교황당으로 결집한 것이다. 양측은 정권을 잡기 위해 합법적 수단은 물론이고 때론 무력 동원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내분은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13세기 들어 피렌체도 다른 많은 도시들처럼 2인 집정관 체제를 버리고 포데스타 Podesta' 제도2)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1246년 안티오키아공 프리드리히가 새 포데스타에 선임된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인 안티오키아공은 황제당 귀족들과 손잡고 교황당 인사들을 조직적으로 공직에서 배제, 축출하는 공작을 벌였다. 그러자 교황당은 무장 봉기를 일으켜 안티오키아공과 황제당 지도자들을 도시에서 쫓아낸다(1250년). 권력을 잡은 교황당은 정부 구조를 다시 개편했다. 정부를 이끌 수장으로 민중 대표 Capitano del Popolo직을 신설해 행정을 맡기고 12인의 원로단과 길드 대표회의(24인)가 입법권을 행사하게 했다. 행정 수장이었던 포데스타와 귀족 중심인 포데스타의 자문회는 정부 주요 정책을 비준, 감시하는 수동적 역할로 바뀌었다. 전통 귀족층의 권력을 크게 줄이고 대상인, 부유한 시민층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한 개혁이다.


 물론 황제당의 반격도 있었다. 1260년, 황제당 망명자들은 안티오키아공의 동생인 시칠리아왕 만프레디의 후원을 받아 시에나, 피사 군대와 함께 피렌체군을 격파했다(몬타페르티 Montaperti 전투). 피렌체에 입성한 만프레디는 반란의 싹을 잘라 내고자 도시 전체를 파괴해 버리려 했지만 황제당의 수장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 Farinata degli Uberti가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역사적인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비극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고향 피렌체의 소멸은 막았는지 몰라도 황제당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몰락은 막지 못했다. 파리나타가 죽고(1264년) 뒤이어 만프레디마저 전사하자 교황당은 다시 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탈환했다(1266년). 쫓겨난 황제당원들은 황제당 도시인 아레초의 군대를 앞세워 재기를 노렸지만 캄팔디노 Campaldino 전투(1289년)에서 피렌체군에게 대패했고 이후로 다시는 공화국의 권력을 되찾을 수 없었다.

좌: 파치노 디 보나귀다 <몬타페르티 전투>,  우: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

 불행하게도 교황당의 승리는 내분의 종결로 이어지지 않았다. 캄팔디노의 승리 후 교황당의 중추인 중상 시민 계층은 흑당(Neri)과 백당(Bianchi)으로 분열해 다투기 시작한다. 은행가와 거상들이 이끄는 7개 대길드 조합원들은 교황청과 사업상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이 피렌체 내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간섭하길 원했고 흑당으로 불리게 됐다. 반면 중소 상공인, 전문 지식인 직종 중심의 여타 길드 조합원들은 교황의 내정 간섭을 반대하며 백당으로 결집했다. 흑당은 1301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프랑스의 앙주 백작 샤를을 끌어 들여 백당 인사들을 추방하고 공화국을 장악했으나(단테도 이 때 추방 당했다), 당의 두 지도자 코르소 도나티 Corso Donati와 로쏘 델라 토사 Rosso della Tosa가 권력 다툼을 벌여 다시 분열과 혼란을 거듭한다. 결국 도나티는 암살 당하고(1308년), 더이상 시민들의 지지와 질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흑당은 쫓겨난 황제당과 백당 인사들의 복귀를 받아들였다.


위기의 시대: 14세기

 1300년대에도 초반에는 경제적 번영이 계속되는 듯 보였다. 피렌체의 은행가들은 교황청은 물론 잉글랜드, 프랑스 왕실의 금융 거래를 거의 전담할 정도였고 양모 가공업은 유럽 전체 생산의 10%를 차지할 만큼 활황을 누렸다. 세기 초 피렌체의 인구는 12만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위기는 일찍 찾아왔다. 아비뇽으로 이전 당한 뒤3) 교황청은 이탈리아 영지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이 줄어 재정난에 빠지고, 백년전쟁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실의 지불 능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막대한 대출을 회수하지 못한 피렌체 은행들이 하나씩 도산하기 시작했다(1311-1346). 여기에 유명한 용병대장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니 Castruccio Castracani가 루카의 지배자가 되면서 공화국의 서쪽 국경을 위협해 왔다. 이전 세기까지 효율적인 보병 중심의 시민군을 유지하던 피렌체 군대는 오랜 경제적 호황으로 시민들의 징집기피 심리가 늘어나고 중장기병 중심으로 변화하는 새로운 전쟁 양상에 적응이 늦어지면서 크게 약화돼, 피사와 루카의 군대에게 연이어 패전한다(몬테카티니Montecatini 1315, 알토파시오Altopascio 1325). 게다가 이 무렵부터 토스카나와 움브리아를 휩쓸기 시작한 유랑 비적 용병단의 습격도 피렌체 성밖의 치안을 위협하는 또다른 골치거리였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피렌체 시민들은 1342년 브리엔 백작 고티에 Gautier IV de Brienne(명목상 작위인 아테네 공작으로도 불림)를 초빙해 한시적으로 공화국 정부를 맡긴다. 그러나 개인 권력을 강화하는데 더 관심이 많았던 백작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넓힐 계산으로 중하층민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들을 남발했다. 결국 상층 시민들의 봉기로 백작은 이듬해에 쫓겨났지만 그로 인해 피렌체의 새로운 내분은 격화됐다. 13세기 황제당-교황당 분쟁이 귀족 대 시민 계급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시민층이 은행가와 거상 등의 상류층으로 대변되는 대시민(Popolo grasso)들과 중소 상공인, 전문직 종사자 중심의 소시민(Popolo minuto)으로 나뉘어 정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방적공 추토 브란디니 Ciuto Brandini가 이끈 소시민-하층민들의 난(1345)에 이어4), 구 귀족 가문들과 연합한 대시민 계급의 권력 독점 시도가 이어졌고 이후로도 두 계층의 갈등은 세기 말까지 공화국 정치를 어지럽혔다.


 14세기에 피렌체를 강타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아마 흑사병의 창궐일 것이다. 1340년대 널리 퍼진 흑사병으로 피렌체 인구는 3만에서 5만 명이 감소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치명적인 전염병이 가져온 심리적 충격과 함께 단기간 인구 급감에 따른 경제적 타격도 컸다. 노동집약적 수공업과 인적 교류가 필수적인 금융업이 중심인 피렌체의 경제는 병이 돌 때는 노동력 부족, 감염병 유행이 끝난 뒤에는 급격한 임금 상승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기 후반에는 이례적으로 큰 전쟁에도 휘말렸다. 1375년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은 로마로 복귀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명목상 영토인 로마냐와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에 실질적 지배를 강화하려 나섰다. 문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이미 수 년 전부터 교황청의 대 밀라노 전쟁에서 소극적 지원 태도를 보인 피렌체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교황령 도시들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피렌체 변경의 일부 땅을 침범하는가 하면, 자신의 군대와 계약 만료된 용병단들이 중부 이탈리아를 약탈하고 다니도록 방치하고 기근으로 곤경에 처한 토스카나 도시들의 교무금 삭감 요청도 묵살했다. 참다 못한 피렌체는 밀라노와 동맹을 맺고 토스카나, 로마냐의 여러 도시들을 반교황 전선에 끌여들였다. 1375년 이렇게 시작된 8성인 전쟁5)은 별 소득 없이 3년 만에 끝났다. 무력으로 로마냐와 움브리아 도시들을 평정한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1377년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곧 세상을 떠났고 피렌체는 새 교황과 정전에 합의했다. 교황군의 핵심 지휘관인 용병대장 존 호크우드 John Hawkwood를 매수한 덕분에 피렌체 영토는 전쟁 내내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 뇌물로 바친 합의금, 공화국이 3년간 소비한 전쟁비용, 전후 교황청과의 화해 조건으로 배상한 금액 등 재정적 손실은 매우 컸다.

좌: 주세페 가테리 <촘피의 난>, 중: 바르젤로 궁, 우: 베끼오 궁

 

 전쟁이 끝나자마자 또다른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다. 바로 후대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조로 평가받는 촘피의 난이다. 전쟁 중 경제난과 중과세에 시달리던 소시민층은 14개 중소 길드의 정치적 권한과 발언권 강화를 골자로 한 정치 개혁을 요구한다. 그러나 개혁안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대시민과 소시민층은 독자적인 직능 길드를 갖지 못한 비숙련 노동자들의 이익을 철저히 외면했고, 이에 분노한 비숙련 직조공(촘피 Ciompi)들은 하층 노동자의 정치 참여 보장,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을 목표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1378년 7월, 무력으로 바르젤로 Palazzo Bargello와 베끼오 궁 Palazzo Vecchio을 점거한 촘피는 비숙련 노동자를 대표하는 길드 3개를 신설하고 새 정부를 구성했다. 하층 노동자 대표들과 일부 소시민 인사들이 이끄는 이 '촘피 정부'는 재산세 도입, 노동자 처우 개선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시행했으나 잦은 내분과 대시민 및 일부 소시민 리더들이 사주한 방해공작 등으로 약화된 끝에 1382년 사라졌다.


 촘피의 난 이후 개혁은 수로포 돌아가고 피렌체의 공화주의 정신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이제 알비찌 Albizzi, 리치 Ricci, 알베르티 Alberti 등 소수의 유력한 대시민 가문에 의해 좌우되는 정부는 하층민들을 대표하는 세 길드를 없애고 촘피 정부가 도입한 대부분의 개혁 정책을 폐지했다. 1400년 무렵이 되면 다른 대시민 가문들은 밀려나고 알비찌가 시정을 독점할 유력한 주자로 떠오르는데 바로 이 때 신흥 은행가 집안 메디치 Medici가 신진 부유층의 지지와 중소 길드들의 호의를 얻어 새 경쟁자로 부상한다.



1) Via Francigena: 알프스 너머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중세의 주요 도로. 알프스의 유명한 성 베르나르 패스를 거쳐 파비아 Pavia, 루카, 시에나를 지나 로마에 이른다. 중세 유럽의 가장 중요한 교역로이자 순례객들의 통행로 중 하나였다.


2) 중세 후반 극심한 정쟁과 내분에 시달리던 중부, 북부 이탈리아의 많은 소국들이 명망있는 외지인을 포데스타로 임명해 일정 기간 정부 운영을 맡기던 제도. 그러나 피렌체의 사례처럼 애초 취지와는 반대로 포데스타들이 내부 권력 다툼을 더 조장하거나 아예 개인 권력을 강화해 독재를 시도하는 부작용이 많았다.


3) 아비뇽 유수: 1309년 프랑스 왕 필립 4세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반목하다 교황을 납치해 폭행하고 남프랑스로 끌고가 억류한다. 이 때부터 교황청은 1377년까지 프랑스왕의 감시 하에 아비뇽에서 유지됐으며 보니파키우스의 후임 교황 7명은 모두 프랑스인들이 즉위했다.


4) 1345년 5월, 방적공 브란디니가 모직, 방직업의 하급 노동자들 조직해 파업을 주도하다 체포돼 처형당한 사건. 촘피의 난에도 영향을 끼쳤다.


5) 피렌체 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8인 위원회가 전쟁을 지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교회의 폭압에 맞선다는 전쟁의 대의를 성스러운 행동으로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풍자일 뿐 카톨릭의 어느 성인/성녀와도 실질적인 관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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