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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Sep 26. 2021

피렌체2

르네상스부터 통일 이전까지

메디치 집권 시대

 부친 조반니 디 비치 Giovanni di Bicci가 쌓은 막대한 부와 함께 가문의 수장 역할을 이어받은 코시모 일 베끼오(Cosimo de' Medici, il Vecchio)는 성공적인 이미지 관리로 점차 중소 상공인과 하층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며 알비찌파와의 정치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리날도 델리 알비찌 Rinaldo degli Albizzi는 스트로찌 Strozzi가문과 연합해 코시모를 권력남용과 부패 혐의로 고발하고 투옥시키는 데 성공한다(1433년). 이들은 재판으로 코시모를 사형에 처하려 계획했지만 여의치 않자 메디치 지지자들의 봉기와 용병대장 니콜로 다 톨렌티노의 쿠데타를 우려1)해 국외 추방을 선고했다. 그렇게 베네치아로 망명한 코시모는 불과 1년 뒤, 알비찌 정권이 계속된 대 밀라노 전쟁의 전략적 실책과 패전으로 민심을 잃고 친 메디치 인사들이 정부 요직을 되찾으면서 피렌체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제 알비찌를 추방하고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가 됐지만 코시모는 항상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처신했다. 가급적 몸소 공직에 오르는 상황을 피하는 대신, 유능하고 충실한 협력자나 지지자들을 중요한 자리에 당선되도록 조종하는 방식으로 정부를 간접 지배했다. 한편, 겸손하고 해롭지 않은 인물로 인식된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도 힘써 항상 검소한 의복에 나귀를 타고 다녔다. 또한 문화예술 활동이나 공공사업, 자선 사업 등도 아낌없이 후원하며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외 정책에서 코시모는 북중부 이탈리아의 안정을 꾀했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계속된 롬바르디아 전쟁 2)을 끝내고 이탈리아 5 대국(베네치아, 밀라노, 교황령, 나폴리 왕국, 피렌체) 사이의 세력 균형을 도모하고자 노력했으며, 그 일환으로 자신과 친분이 깊은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Francesco Sforza를 지원해 1450년 새 밀라노 공작으로 만들었다3).

좌로부터 코시모 일 베끼오, 피에로(통풍환자), 로렌초 일 마니피코(위대한 로렌초)


 1464년 코시모가 세상을 떠나고 장남 피에로(통풍 환자 피에로)가 뒤를 이었다. 일찍부터 통풍으로 병약했던 그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양호하게 가문의 사업과 정치를 이끌었다. 반 메디치 세력과 결탁한 루카 피티 Luca Pitti(피티 가문은 코시모 시대에 메디치의 주요한 협력 세력 중 하나였다)가 페라라 공작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기도했으나(1466년), 볼로냐 군주사전 경고와 아들 로렌초의 신속한 대응 덕분에 쿠데타를 손쉽게 진압한다. 또한 밀라노 공작과 베네치아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밀라노의 동맹이던 피렌체도 함께 전쟁에 말려들게 되는데, 이전보다 강해진 베네치아의 군사력을  인식한 피에로는 세력균형 정책에서도 유연성을 발휘해 재빨리 교황청, 나폴리 왕국과도 동맹을 맺는다. 결국 피렌체-밀라노-교황-나폴리의 4국 연합군은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몰리넬라 Molinella 전투, 1467).


 피에로가 죽자(1469년) 큰 아들이 가문의 수장 역할을 물려받았는데, 그가 바로 일 마니피코(il Magnifico 위대한 자)라 불리게 되는 로렌초 Lorenzo de' Medici다. 로렌초의 치세에 피렌체 르네상스 문화의 융성은 최고조에 이른다. 여기에는 선대부터 지속된 메디치 가문의 적극적인 문예 후원이 이 시기에 결실을 맺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로렌초 자신이 기여한 몫이 크다. 진심으로 문화예술을 사랑했던 로렌초는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 스스로 시인, 예술가로 창작활동을 했다. 게다가 주로 정치, 경제적 목적으로 예술가를 후원하던 조부나 개인의 심미적 취향에 이끌려 예술품을 수집하는 데 그쳤던 부친과 달리, 그는 직접 교육기관을 세워 문인, 예술가들을 양성한 것은 물론이고 주변의 많은 친구와 지인들에게 재능 있는 예술가를 소개해 주며 작품 의뢰, 후원을 권유하는 등 열성적인 문화 진흥자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메디치 가계도


 로렌초는 조부 코시모가 세워 놓은 정책의 기본 노선을 대체로 충실하게 따르며 장기간의 평화를 유지했다. 배후에서 공직 출마자 명부를 좌우하는 방식으로 측근과 지지자들을 통해 정부를 간접 지배하는 한편, 적극적인 외교로 5 대국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여 가급적 전쟁을 피하고 신성로마 황제, 프랑스왕의 이탈리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막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원래 이윤 추구에 큰 열의가 없었던 로렌초는 사업보다 문화 예술 활동, 외교에 치중했기 때문에 은행의 경영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가 이끄는 동안 메디치 가문은 많은 재산을 소진했다.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자산이었던 소탈하고 겸손한 부자라는 메디치 집안의 이미지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통 크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호사스러움을 즐기며 예술 작품 구매나 후원에 지출을 아끼지 않은 로렌초와 동생 줄리아노의 씀씀이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안정을 누리던 로렌초의 치세도 파찌 음모 사건으로 한 차례 큰 위기를 겪는다. 로마냐와 중부 이탈리아 일대에 자신의 군주국을 세우려 했던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 Girolamo Riario는 피렌체의 반 메디치 세력인 파찌 가문, 피사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Francesco Salviati와 공모해 로렌초와 줄리아노 형제를 암살하려 음모를 꾸몄다. 1478년 4월, 음모자들은 미사 도중 로렌초 형제에게 칼을 휘두르는데, 줄리아노는 현장에서 살해당했으나 로렌초는 측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몸을 피했다. 소식이 퍼지자 분노한 군중들은 정권을 장악하려고 봉기를 선동하던 음모자 일당들에게 달려들었고, 이들을 붙잡아 마구 폭행한 뒤 프란체스코 파찌 Francesco Pazzi와 피사 대주교를 포함한 주동자들을 목매달아 죽였다. 음모를 배후에서 지원했던 야코포 파찌 Jacopo Pazzi는 나중에 붙잡혀 교수형 당했고 파찌 가문 전체는 추방됐다. 사건 당시 피렌체에 없었던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대신해 군중들은 친척인 라파엘레 Raffaele 리아리오 추기경을 감금하는데, 교황은 이를 구실로 로렌초를 파문하고 나폴리왕, 우르비노 공작과 함께 피렌체 공격에 나선다. 연이은 피렌체군의 패전으로 위기에 몰리자 로렌초는 과감한 외교 카드를 꺼냈다. 그는 직접 나폴리 왕국을 찾아가 석 달 동안 국왕을 설득한 끝에 나폴리 군대의 철수를 이끌어 냈고, 피렌체 군중들의 분노로부터 리아리오 추기경을 안전하게 보호해 교황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결국 나폴리군의 전선 이탈과 악화된 여론으로 곤란해진 교황은 로렌초 파문을 철회하고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메디치의 권력 상실과 사보나롤라, 시민 공화정(1494-1512)

 위대한 로렌초가 사망한 후 장남 피에로가 뒤를 이었다(1492년). 그러나 불운한 피에로는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미처 펼쳐 보일 기회가 없었다. 피렌체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라는 이름의 도메니코회 수도사가 신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예언과 설교를 하고 다니며 청년들을 중심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가고 있었는데, 때마침 나폴리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프랑스왕 샤를 8세가 1494년 대군을 이끌고 북이탈리아로 들어왔다. 샤를 8세는 밀라노를 간단히 점령하고 공작을 갈아 치운 뒤4) 피렌체에게 영토의 통행 보장과 동맹을 요구하지만 여러 나라가 연루된 복잡한 전쟁의 빌미를 만들기 싫었던 피에로는 중립을 선언하면서 협상으로 통행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샤를 8세의 진군이 신의 심판이라 주장하는 사보나롤라와 추종자들로 인해 피에로의 중립 결정은 피렌체 국내에서 여론의 지지를 잃었고, 여기에 일부 영토와 요새들을 내주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피했다는 협상 결과가 알려지자 그 해 11월 반 메디치 폭동이 일어났다. 결국 피에로는 일가족을 데리고 피렌체에서 도망쳤고, 공화국 정부는 사보나롤라를 따르는 인사들이 장악했다.

좌: 사보나롤라의 초상화, 우: 1494년 샤를 8세의 침공 직전 이탈리아


 성직자인 사보나롤라는 공식적인 직책을 맡을 수 없었으나 영적인 권위를 지닌 고문으로 대접받으면서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샤를 8세를 찾아가 자신에게 내린 계시 속에서 신이 프랑스왕에게 부여했다는 사명과 그에 대한 피렌체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야기하며 환심을 샀고, 그 덕분에 프랑스 군대는 피렌체 영토를 비교적 조용히 통과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더욱 큰 지지와 권위를 얻게 된 사보나롤라는 부유층,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만인의 회개를 촉구하며 피렌체를 신의 나라로 거듭나게 하겠다고 나섰다. 사회 정화와 개혁을 명목으로 유흥을 금지하고 청년들을 조직해 대대적인 복장과 풍기 단속을 시행하는가 하면, 사치품이나 종교적이지 않은 예술품, 서적들을 모아 불태우는 허영의 소각식도 크게 벌였다.


 한동안 사태를 방관하던 교황 알렉산더 6세는 피렌체가 자신이 주도하는 반 프랑스 동맹에 참여하길 거부하자 사보나롤라의 언행과 사상을 면밀히 주시했고, 마침내 개입에 나섰다. 교황은 사보나롤라의 계속된 교회 지도부 비판과 증명되지 않은 신비주의적 예언에 우려를 표하면서 그의 신앙을 검증하려 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건강을 이유로 교황의 로마 소환에 불응했을 뿐 아니라, 뒤이어 내려진 설교 금지 명령도 어겼다. 교황은 그를 파문했고 피렌체 시민들에게 사보나롤라를 계속 따른다면 시의 성무 집행을 정지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사보나롤라의 숨 막히는 신정 통치로 경제, 문화는 위축되고 시민들의 불만이 커져 가던 중이라 여론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때, 사보나롤라에 비판적이던 프란체스코회의 한 수도사가 그에게 '불의 시련5)' 검증을 하자고 제안했고 사보나롤라의 심복 수사가 이를 받아들였다. 검증 당일, 갑자기 내린 비로 행사 취소가 선언되자, 하루 종일 이를 기다리던 군중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결국 성난 군중들의 폭동에 굴복한 정부는 사보나롤라와 심복 수사 두 명을 체포했고,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린 후 세 사람을 화형에 처했다(1498년 5월).

좌: 사보나롤라의 처형, 중: 피에로 소데리니, 우: 1490년대 피렌체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뒤 중소 상공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주도하는 시민 정부가 들어섰다. 특히 피에로 소데리니 Piero Soderini가 정부를 이끌면서(1502-) 그의 온건 개혁 정책과 함께 피렌체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갈 수 있었다.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정부의 상급 관리로 여러 중책을 수행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메디치 재집권과 토스카나 공국의 시작(1512-32)

 쫓겨난 메디치 가문은 호시탐탐 복귀의 기회를 노렸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신성로마 황제, 베네치아, 스페인 등과 함께 프랑스왕 루이 12세에 대항한 신성동맹을 결성하는데, 피에로 다음으로 메디치 가문을 이끌던 조반니 Giovanni di Lorenzo도 여기에 가담한다. 피렌체 정부 수반인 소데리니는 한 때 메디치 가문의 협력자였지만 메디치의 복권을 막기 위해 끝까지 친 프랑스 노선을 고수하다 1512년, 신성동맹 군대의 공격에 패하고 말았다. 승자로 돌아온 조반니는 그러나 바로 이듬해 새 교황(레오 10세)으로 선출되면서 피렌체의 권력을 동생 줄리아노 Giuliano에게 물려주게 된다. 하지만 줄리아노는 불과 3년 만에 병사하고 조카 로렌초 2세(피에로의 아들)가 그를 승계했다(1516년).

좌로부터 조반니(레오 10세), 줄리오(클레멘트 7세), 로렌초 2세


 성미가 급한 로렌초 2세는 공화정 체제의 복잡한 절차를 싫어한 탓에 정부 관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피렌체 정사보다 델라 로베레 Della Rovere집안과 우르비노 공작자리를 두고 다투는 일에 더 열중하다가 별 소득도 없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1519년). 뒤를 이어 레오 10세의 사촌 줄리오 Giulio(파찌 음모 때 살해당한 줄리아노의 아들)가 피렌체를 맡게 되는데, 그는 전임자들에 비해 직접적이고 다소 전제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대신 검소하고 효율적으로 통치했다. 그렇지만 그의 집권도 길지는 않았다. 1523년 줄리오가 교황(클레멘트 7세)으로 선출됐기 때문이다. 줄리오는 자신의 후임으로 조카 이폴리토 Ippolito와 로렌초 2세의 아들 알레산드로 Alessandro를 지명하고 로마로 떠났다.


 문제는 줄리오가 떠난 뒤 커졌다. 아직 십 대 소년이었던 이폴리토와 알레산드로를 위해 추기경 실비오 파세리니 Silvio Passerini를 섭정으로 선임했는데, 이것이 실책이었다. 파세리니는 피렌체 시민들 사이에 인기도 없었던 데다가 통치 능력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서로 사이가 나빴던 이폴리토와 알레산드로를 전혀 중재하지 못했다. 결국 1527년 로마 약탈6) 사건이 벌어지고 교황 지지자들의 위세가 급락한 틈을 타 피렌체의 반 메디치 세력이 봉기를 일으켰고, 메디치 가문은 다시 추방됐다.


 로마 약탈 사건 이후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는 교황을 복속시키고 프랑스, 베네치아 등을 압박해 정전협정을 맺어 자신에게 대항하던 동맹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그러나 황제는 교황 클레멘트 7세의 부탁에 따라 피렌체만은 강화를 제안하지 않고 무력으로 점령해 메디치 집안에 넘겨주기로 한다. 황제의 대군이 토스카나로 진격해 도시를 포위하자, 반 메디치 세력이 주도하는 피렌체 정부는 10개월 동안이나 저항했으나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530년, 피렌체의 권력을 되찾은 메디치 가문은 공화정을 폐지하며 토스카나 공국으로 개편을 선언했고(1532) 황제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초대 공작으로 임명했다.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그리고 그 이후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집권했지만 알레산드로는 처음부터 전제적 통치를 밀어붙였다. 피렌체에 재입성하자마자 성문 밖에 견고한 요새(Fortezza da Basso)를 지어 신성로마 황제의 스페인 군대를 주둔시켰고 정적과 불평 분자들에 대한 감시와 사찰, 탄압도 집요하게 벌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이유로 반 정부 혐의를 쓰고 투옥, 고문당하거나 추방됐으며 피렌체인들의 원성은 날로 높아갔다. 마침내 1537년 1월, 친척 로렌치노 Lorenzino('로렌자치오' Lorenzaccio로도 불림)가 한 밤중 은밀히 알레산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꾀어내 공범 한 사람과 함께 칼로 살해했다. 사전에 누구와도 모의하지 않은 로렌치노와 공범은 곧바로 베네치아로 달아났고7), 다음 날 알레산드로의 시체를 발견한 메디치 지지자들은 반대파들에게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서둘러 후임 공작을 추대했다. 그렇게 해서 갑작스럽게 공작의 자리에 오르게 된 인물이 코시모 일 베끼오의 동생 로렌초의 후손이자 용병대장으로 유명한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8)의 아들 코시모 1세 Cosimo I de' Medici였다.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좌)와 코시모 1세(우)


 18살에 권좌에 오른 코시모 1세는 메디치 가문의 지배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우선 명목상으로 남아있던 공화정의 협의체들을 폐지하는 한편, 유력 가문 인사들의 지지를 얻으며 일련의 법안을 신설해 공작의 권한과 권력을 강화했다. 이에 공화파 인사들이 국외로 도주해 기존의 망명자들과 규합하여 군대를 일으키는데, 코시모는 재빠른 대응으로 용병부대를 편성하고 스페인군의 지원을 받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반 메디치파의 주요 인사들은 이때 거의 대부분 체포, 처형되거나 해외로 피신했고 피렌체의 공화주의 세력은 와해됐다.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고 나서 코시모 1세는 공국의 힘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황제 카를 5세의 호의를 얻어 스페인 주둔군의 철수를 이끌어냈고 징병제를 부활시켜 피렌체만의 상비군을 창설했다. 1555년에는 이 군대를 활용해 황제에게 반기를 든 시에나를 점령, 병합함으로써 4년 뒤 루카를 제외한 토스카나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황제의 심복이자 엄청난 부를 자랑하는 나폴리 총독 돈 페드로 데 톨레도의 외동딸 엘레오노라와 결혼해(1539년)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동시에 챙겼고, 가문의 전통인 문화예술 후원에도 매우 열성적이었다. 또한 신성로마 황제, 교황의 신임을 오랫동안 유지한 끝에 1569년에는 교황으로부터 대공의 작위를 받기에 이른다.


 코시모의 사후(1574)에도 그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대공의 자리를 이어오다 1737년 잔 가스토네 Gian Gastone de' Medici(페르디난도 2세의 손자)가 사망하면서 메디치 가문은 더 이상 대를 잇지 못한다. 대공의 직위는 신성로마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시스 1세 로렌 공(프랑스왕 앙리 4세의 비 마리아 데 메디치의 고손자)에게 넘어갔고 이후 토스카나 대공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종속된 위성국으로 격하됐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잠시 프랑스 제국의 일부로 병합됐다가(1807-14년) 오스트리아의 위성국으로 복귀했지만 1860년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에 점령되면서 이듬해 통일 이탈리아의 일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1) '르네상스 미술과 콘도띠에리2' 참조

2) 베네치아 공화국과 밀라노 공화국 및 이들의 동맹국들 사이에 4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쟁(1423-54). 피렌체는 전쟁 기간 대부분 베네치아와 동맹이었으나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자리를 차지하자 전쟁 막바지에는 밀라노 편으로 돌아섰다. 이 전쟁으로 북이탈리아 여러 소국들이 크게 쇠퇴하고 5대 강국이 정세를 주도하는 시기가 시작됐다.

3)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롬바르디아 전쟁에서 밀라노에 고용돼 싸우다 베네치아-피렌체 편으로 옮겨가고 다시 밀라노와 계약하기를 반복했다. 1447년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Filippo Maria Visconti가 죽은 뒤 비스콘티 가문이 밀려나고 공화정(암브로시오 공화국)이 들어섰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에 고용돼 있던 스포르차는 군사적 위협으로 밀라노를 압박한다. 여기에 기근과 식량난이 겹쳐 폭동이 심해지자 암브로시오 공화국 정부는 필리포 마리아의 사위인 스포르차에게 통치를 맡긴다. 그는 정권을 넘겨받자마자 공화정을 폐지하고 자신이 공작의 지위를 계승했다고 선언한다(1450년).

4)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Gian Galeazzo Maria Sforza의 삼촌 루도비코 Ludovico 스포르차의 요청으로 밀라노를 점령한 샤를 8세는 잔 갈레아초를 폐위시키고 루도비코를 공작자리에 앉힌다.

5)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유무죄 여부나 신앙의 진실성을 가리기 위해 행하던 심판 방식. 불타는 재나 숯더미 위를 걷게 한 뒤 큰 부상을 입지 않으면 신의 뜻이 함께 하는 증거로 여겼다.

6) 코냑 동맹(교황령, 프랑스,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페라라)과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전쟁 중 황제군의 일부 부대가 1527년 5월 로마를 점령하고 대대적으로 약탈한 사건. 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대는 전멸당했고 교황은 산탄젤로 성에 7개월이나 갇혀 있어야 했다. 무차별 약탈과 살육으로 1만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로마 시내의 대저택과 수많은 교회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7) 원칙상 코시모 1세보다 계승 서열이 앞섰던 로렌치노는 몇 년 뒤 베네치아에서 코시모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됐다.

8) '콘도띠에리 열전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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