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하고 이력서를 냈다가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깜짝 놀랐다. 여러 자료를 찾고 준비하면서 The Washington Post 케치 프레이즈가 'Democracy dies in darkness'라는 것을 보고 어쩐지 가슴이 뛰었다. 다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력서도 그렇지만 인터뷰도 편안하게 했다. 나는 한번 27년의 커리어를 살아냈으며 퇴직 후 4년간 청소년기의 자녀와 나름 알찬 시간을 보내고 최근에는 평소에 궁금했던 동요 만들기, 동화 구연, 브런치 글쓰기 등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혹시 또 한 번의 일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인생의 별책부록, 선물이라고 생각하자고 가볍게 임했다. 이력서도 학교 전공이나 직장에서의 일 보다는 요즈음 하고 있는 활동과 생활을 주로 썼다.
인터뷰 3일 후 커피를 마시자는 톡이 왔고 인수인계를 받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게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너무 좋아 믿기가 어려웠다. 내 전임자와 1시간 정도 간단한 인수인계 미팅이 있었고 계약서가 메일로 왔다. 필요한 서류들과 함께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5월 23일부터 일을 하게 되었다. 1주일 20시간의 파트타임이지만 조직에 들어간다는 것이 참 설레기도 하고 조금은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에 잘 안 쓰던 Outlook이나 Slack과 친해 지는 것도 쉽지 않다.
첫 임무는 한국에서 약 1년간 활동하고 있는 미국 기자의 은행 업무를 돕는 것. 4살 때 입양되어 미국인으로 교육받아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기자로 일하다 한국에 와서 주민등록증을 복구한 케이스. 따라서 은행 통장 등 업무도 주민등록증을 기본으로 하려고 이름 변경 신청을 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다음 업무는 갑자기 업무지가 바뀐 직원의 남은 짐을 국제 택배로 보내주는 일. 그리고 그다음은 종합소득세 신고와 세금 납부를 돕는 일. 그리고 그다음은 역시 한국에서 일할 미국 기자의 미국 운전면허증을 한국 면허증으로 바꾸는 일.
이러한 행정업무를 하다가 지국장에게 톡이 왔다. 다음 주에 해외 지사를 총괄하는 고위 간부가 내한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입국 관련 최신 정보를 알아보고 정리는 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그 보스의 보스가 함께 오기로 했다고 방한 프로그램을 담당하라는 지시였다. 물론 할 수 있겠냐고 먼저 물어보았다. 나는 어려울 거 없으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10-20여 명의 직원들과의 그룹/개별 면담을 포함하여 관련 기관 방문 일정 조정이 새로 맡은 일. 일을 시작한 지 2주 만에 중요한 미션이 주어지니 조심스럽고 또 실수하지 않도록 계속 확인하면서 진행했다. 일정에 추가해달라는 새로운 요청들이 들어왔고 워싱턴과의 13시간 시차가 있으니 주로 밤 12시부터 앉아서 새벽 2, 3시까지 일정 정리를 해나갔다.
두 명의 게스트가 잘 도착하고 다음날 아침 Wework 출입을 도와주는 것이 일단 나의 첫 대면 미션. 회의를 위한 장소 등을 확인하고 일정을 계속 업데이트하는 중 나를 고용한 담당자와 40분 정도 면담을 하고 그날 저녁 관계자 모두와의 그룹 디너. 1인당 예산을 주고 사무실과 가까운 곳으로 정해 보라 해서 긴 역사를 가진 한식집으로 정했다. 정식 코스 요리들을 설명하고 간단히 와인을 조금씩 따르는 동안 서로 처음 만나는 임직원들 간에 이야기 꽃이 피었다. 나도 이야기를 조금 할 기회가 있어서 회사에 고용되면서 받은 업무 메일로 회사 사이트에 직원 신분으로 들어가서 처음 한 일이 직원용 쇼핑몰에 들어간 것이다. The Washington Post T-shirts랑 모자가 예쁘고 가격도 좋아서 몇 개를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를 하려는데 물건 가격의 두배 정도가 배송비로 붙더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냥 왜 그런 이야기를 그런 자리에서 했는지...
그리고는 진짜 궁금한 게 있다고 물었다. 지금까지 만난 기자님들은 다 잘 모르겠다고 해서 묻는데 'Democracy dies in darkness'는 언제부터 Wapo의 표어가 된 건지 그리고 누간 만들었는지 물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청말 궁금했는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2013년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가 위싱턴 포스트를 인수하고 새로운 케치 프레이즈에 관해 여러 의견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Stories must tell과 Democracy dies in darkness 가 각축을 벌였는데 Jeff Bezos가 Democracy dies in darkness로 정했다는 것. 아마존 창업자랑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랑 내가 일하는 게 참 신기하고 새로웠다.
디저트가 나올 때 즈음 참으로 수평적인 문화가 좋으면서도 그래도 멀리서 직원들 보러 왔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한국 직장 상사들은 이런 회식 자리에서 짧은 건배사를 하던데 미국 회식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네 했더니, 미국 스타일은 아니지만 한국에 왔으니 그리 하겠다면서 이렇게 1년 동안 열심히 일해준 그래서 새로운 아시아 지국의 서울 정착을 성공적으로 해내 준 지국장과 기자를 그리고 직원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멋지게 해 주어 분위기가 한층 더 좋아지는 것 같았다.
디저트가 나오고 파하는 분위기가 되자 미국에서 온 임원들이 워싱턴 포스트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배송비가 비싸서 티셔츠를 구매하지 못했던 내 사정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Democracy dies in darkness'가 세겨진 모자와 티셔츠를 하나씩 꺼내 가도록 봉지를 돌렸다. 네이비 색과 흰색의 셔츠와 모자를 한두 개씩 꺼내며 모두들 즐거워했다. 나도 모자 하나 셔츠 하나 받아 들고는 정말 팀의 일원이 된 거 같아 기뻤다.
장마 속에서 출장 일정을 진행했던 보스들 끝까지 웃는 얼굴로 나이스 하게 해야 할 일 모두 다 하고 마지막 날에는 아마도 자신들의 출장비 아껴서 구매한 듯한, 한국 화장품 좋은 거 어떻게 아시고, 마스크 팩 세트와 선크림 등 여러 가지 선물을 사서 직원들에게 하나씩 건네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새로운 직장에 들어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갑자기 맡게 된 VIP 일정 짜는 일이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책임감에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무사히 또 웃는 얼굴로 잘 마무리되어 너무나 감사하다. 무엇보다 'Democracy dies in darkness'에 대한 배경을 자세히 알게 되어 기뻤다. 글과 영상 기사로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기자는 아니지만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잘 돕는 일 또한 소중하다고 스스로 되새기며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