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빛, 산과 강 그리고 가족 사랑으로 가득한
오래전 출장으로 호주 멜버른에 갔을 때 'Falling from Grace'라는 연극을 봤다. 영어로 밥벌이를 해도 영어 연극을 사전 지식 없이 바로 다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행히 함께 간 동료가 'Falling from grace'는 '신의 은총에서 멀어지다'라는 단어 그대로의 뜻에서 시작되어 '신뢰를 잃다, 사람들의 신임을 잃다'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연극에는 반전이 있다고 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도 한창인 여주인공의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직장상사의 눈 밖에 나고 프로젝트에서도 밀린다. 결국 일자리를 잃고 가족. 친구들과의 갈등도 커져 가지만 우여곡절 끝에 건강한 딸아이를 출산하고 이름을 'Grace'라고 하며 연극은 Happy Ending! 내게 'Grace' 즉 '은혜'라는 단어와 또 이름으로의 Grace에 대해 적잖은 임팩트를 준 시간.
3년 전 다시 성가대를 시작하면서 입대 동기로 '은혜'씨를 알게 되었다. 오디션 통과 후 4주간은 합창 연습만 하고 한 달이 지나야 비로소 찬양 가운을 입을 수 있다. 이 과정을 함께 하다 보니 이야기도 많이 하고 처음 몇 달은 매주 성가 연습 후 점심도 같이 하고 차도 나누었다. 그러면서 우린 동갑이고 자녀들의 나이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학을 전공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졌었지만 지금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하고 싶다고 했다. 작년 가을 즈음 인사동에 갤러리를 예약하였다고 하여 정말 개인전을 하는구나. 대단하다 싶었다. 액자를 맞추고 카탈로그를 인쇄하는 과정을 간간히 들으면서 비전공자의 개인전 준비가 결코 쉽지 않을 텐데 기대반 걱정반.
'아름다운 삶-그림과의 동행'이라고 제목 붙인 이 은혜 작가의 개인전 첫날 안국역은 정치적 이슈로 혼란스러웠다. 차를 돌려 고풍스러운 박물관 뒤에 다행히 주차를 하고 약속시간 보다 10분 정도 늦게 도착. 첫날인데 화환도 많고 예쁜 꽃들도 많다. 3층이라 더 조용하고 몰입감이 있다. 그림을 배우고 처음 완성했다는 '환희'를 시작으로 은혜 씨가 남편을 내조하며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품었던 마음과 인생의 꽃, 또 그를 밝히 이끌었을 빛과 그 빛이 주는 아름다운 색과 온도를 담아낸 산과 강, 그리고 무엇보다 강하게 표현된 가족 사랑이 온 갤러리를 환하게 채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그 과정을 직접 들으며 감상하니 그림 한점 한점이 더욱 생동감 있고 귀하게 다가온다. 키위의 솜털을 표현한 이야기나 벚꽃잎과 나뭇가지들 될까 하고 했는데 그게 바로 되더라며, 그리고 꽃 그림에 등장하는 나비와 연못과 강에 있는 붉은 비단잉어 개수가 일곱 인 것도 작가가 좋아하는 숫자라며 웃는데, 그래 작가는 만드는 사람이니까, 창조하는 사람이니까, 자기 세계는 작가가 마음대로 만드는 게 맞지 나도 미소 진다.
이 은혜 작가가 만든 캔버스 위의 세상은 온통 향기로운 꽃밭,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밝은 빛, 흰 눈이 쌓여 있어도 따스한 산, 형광색 산호가 가득 찬 푸른 바다, 귀여운 물고기가 노니는 얕은 샛강, 그리고 무엇보다 대를 이어 가풍으로 흐르는 가족과 자식 사랑으로 가득하다. 진심을 담아 14년 세월의 열정을 쏟아 부은 작가의 그림 33점을 이렇게 한번에 한 공간에서 마주 하니 내가 살아온 시간과 오버랩 되면서 기대 이상의 감동이 일렁인다.
귀갓길. 전시를 열어 주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계속 그려주어 다행이다. 참 바쁘고 쉽지 않았을 텐데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은혜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