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들어 주는 것들은 내 가까이에 있다.
풀 / 김미희
예전에는 너른 풀밭에
아침에 풀어 놓았다가
저녁에 사람들이 데리러 올 때까지
소들은 풀을 뜯으며
놀다가 자다가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풀이 소들을 기다립니다
오늘은 오겠지?
내일은 꼭 올 거야!
풀은 소를 기다리며 키를 키우다가
자꾸자꾸 자라서
내 허리께까지 자랐습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소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우도봉엔 백세가 넘는 할아버지 등대와 겨우 몇 년 전에 태어난 아기 등대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나란히 서 있다. 우도봉에 오르면 고즈넉이 누운 우도의 모습과 태평양 푸른 바다가 눈 시리게 다가와 안긴다. 그대가 4월에 우도봉 꼭대기에 앉아있다면 보았을 것이다. 칸칸이 펼쳐놓은 유채꽃 물결의 방석들을.
우리 셋째 오빠는 어릴 적 우도봉을 하루에 세 번씩 오르내렸다. 일곱 살 때부터 아침에 소를 몰고 가서 풀어놓고 왔다가 낮엔 물 먹이러 물가로 데리고 왔다가 다시 저녁이면 외양간에 데려다 놓았다. 일곱, 여덟 마리의 우리 소는 오빠의 발 소리를 알아들었을 테고 오빠 발 소리로 오빠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오빠는 소가 목이 마른지, 졸린 지, 새끼를 낳을 때가 되었는지, 배가 고픈지 다 알아들었을 테다.
이렇듯 우리 오빠는 어린 시절 소를 모는 소테우리였다. 그 오빠는 지금 어느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있다. 그리고 오빠가 이름 지어주었던 우리 집 소들은 우리 형제들 공부 밑천이 되어 떠났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집 빈 외양간엔 소들의 영혼만이 머문다.
우리 오빠는 소처럼 맑다. 오빠는 눈이 먼저 웃는다. 보는 사람들 기분이 다 좋아진다. 소테우리 10년이 오빠한테 순박하고 여유로운 영혼을 깃들게 했나 보다. 송아지가 팔려가는 날이면 어미 소 울음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함께 울었던 오빠. 지금도 여전히 사람처럼 소중한 친구를 가슴에 품고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소를 사랑한 예술가들은 많다. 그중 으뜸은 화가 이중섭이 아닐까? 소랑 같이 잔다고 오해받을 정도로 소를 껴안고 입 맞추며 동무로 삼았던 이중섭 화가처럼 윤석중 선생님도 소를 한참 들여다보았나 보다. 오도카니 소 앞에 앉아있었을 선생님이 떠오른다.
‘소’하면 심판받는 소 이야기가 생각난다. 죽어서 똑같이 사람들을 위해 제 몸을 줬는데 왜 소만 천국에 가냐고 돼지가 따졌단다. 그러자 하느님이 그러셨다. 소는 살아서도 나눠주지 않았냐고. 죽어서의 나눔은 살아서 나눠주는 것보다 가치가 덜하다고. 우리가 살아있을 때 나눠줄 수 있는 삶이 진정 가치 있는 삶임을 가르쳐준다. 소처럼 살아서 사람을 위해서 밭을 갈고 죽어서는 곰탕으로 마지막 뼈 한 줌까지 내주는 그런 동물은 흔치 않을 것이다.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동물. 사람과 가장 가까이서 나눠주는 법을 가르쳐주는 소를 나는 사랑한다. 우도봉에서 풀을 뜯는 소들은 이제 없다. 풀들만 내 키만큼 자라며 소들을 기다린다.
오로지 죽어서의 나눔만을 강요당하고 사육당하는 소들에게 나는 오늘 진심으로 자비를 구한다.
『소』
윤석중
암만 배가 고파도
느릿느릿 먹는 소.
비가 쏟아질 때도
느릿느릿 걷는 소.
기쁜 일이 있어도
한참 있다 웃는 소.
슬픈 일이 있어도
한참 있다 우는 소.
오늘의 TIP: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나를 만들어 주는 것들은 내 가까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