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오바니 Mar 31. 2022

부담감을 조절하는 것도 경험이다.

원격근무자의 필수 덕목

 얼마만의 외근인지 모르겠다. 새로운 파트너 기업을 만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내 업무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 다니며 쉴 새 없이 말을 하다 보니 벌써 주변이 어두컴컴하다. 약 8시간 동안 한 달치 말할 분량을 다 떠들었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만큼 진이 빠다. 하지만 그 덕에 입사 후 지금까지 밤낮으로 날 괴롭히던 불안감은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맡은 일을 꽤 잘 해내고 있다는 실감. 그 덕이다. 내 몫을 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만이던가. 랜만에,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였다.


 오늘을 기회로 한국 사무국내 팀원 한 명을 처음으로 만났다. 매일 화상으로만 보던 얼굴을 직접 보니 어색함은커녕 오랜만에 그리웠던 친구를 만난 듯 너무 반가워 석 안아버렸다. 입사 후부터 쭈욱 화면 안에만 존재하던 동료들은 나의 수많은 궁금증과 질문들을 쏟아내기엔 심정적으로 많이 멀었다. 당장 업무에 적응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업무 시간이 제각각 다르다 보니 급하다고 전화를 걸 수도 없어 애가 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처럼 바로 옆에서 눈을 마주치고 궁금한 걸 바로바로 해결해 주는 사람과 같이 있자니 그간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이전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할 때도 일주일에 한 번은 출근해서 동료와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도 떨고 몰랐던 회사 가십도 주워듣는 것이 꽤 큰 활력소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날은 업무 집중도도 올라갔다. 화상으로 얘기하면 수다 떨기가 어렵다. 오디오가 물려서 둘이 동시에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감탄사를 뱉을 수 없는 건 생각보다 꽤 큰 폭으로 수다의 맛을 떨어트린다. 눈을 정확히 마주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친밀감을 떨어트리는 주된 이유다. 결론은 100% 원격근무가 업무의 효율성을 조금은 저하시킬 수있다는 생각이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 업무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외근이 꽤 마음에 든다.


 본사에서도 이를 모를 리가 없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전 직원이 1년에 한 번 이상은 꼭 한 자리에 모인다. 1년에 2회 유럽과 미국에서 무역박람회를 개최하는 우리 회사의 특성상, 그중 하나는 꼭 방문하게 된단다. 러시아가 전쟁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여름에 유럽에 갈 수 있었을 텐데... 한 나라의 정신 나간 독재자가 거시적인 세계 경제뿐만 아니라 이국땅 한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 만난 동료는 나이보다 훨씬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언제나 차근차근 나지막이 말하면서도 할 말은 전부 하는 그녀에게 저절로 신뢰가 간다. 처음으로 외근을 나온 나를 지원하고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준 그녀를 보며 전 회사에서 나를 따돌리던 그 무리가 떠올랐다. 리적으로는 바로 손 닿을 곳에 있었지만 심리적으로 너무 먼 곳에 있던 그들. 몸과 마음의 거리가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한 달 동안 너무 안달복달하던 내 모습에 스로 지쳐갈 때쯤 잠깐 쉬는 시간을 만난 듯한 하루다. 스스로 만든 부담감에 짓눌려 마음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평생 이렇게 날 괴롭히며 살았기에 짓눌림에 내성이 생길 정도다. 하지만 런 방식으로는 이곳에서 오래 버티기 힘들 것임을 직감다. 100% 나의 성과로만 평가받는 원격근무를 하며 매일 일희일비한다면 어떻게 정신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까. 업무에서의 실수나 어려움은 내가 겪는 것이 아닌 이 업무를 맡은 담당자로서의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그 어려움과 자연인으로서의 나의 삶이 뒤엉지 않을 수 있다. 이는, 해야 할 일을 끝냈어도 여전히 업무 공간을 떠날수 없는 원격근무자로서 익혀야 할 필수 덕목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실패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면 한 번의 성공이 절실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