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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Apr 18. 2024

우리 집 잠시 안녕

오랜만에 제주 갈 생각에 분명 가슴이 설레어야 하는데 설레긴커녕 마음이 너무 무겁다. 짐을 싸는 것도 귀찮아 나 같은 파워 J가 며칠 째 짐 싸기를 미루고 있는 중이다.


이번 제주행은 아주 명확한 목적이 있다. 우리 집에 장기로 세를 놓기 위한 계약서 작성이 그것이다. 매달 한 달 살기로 임대를 하면서 청소하는 분과 시간을 맞추고 임차인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어느 순간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가 된 지 어언 2년이 다 되었고 노마드 초창기에는 제주에서의 워케이션을 꿈꿨지만 집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익숙해진 지금의 나는 점점 집 밖을 나서는 것 자체가 귀찮은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코로나가 끝나고 부쩍 늘어난 해외여행 붐으로 한 달 살기 운영 3년 만에 처음으로 공실이 생겼다. 어차피 큰돈 벌자고 시작한 게 아니기에 공실 자체는 큰 타격이 아니었지만 비바람 많은 제주에서 집을 비워 둔다는 것은 큰 걱정거리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아이와 남편을 두고 혼자 제주에 내려와 딴 집살림을 할 수는 없는 노릇. 결론은 세를 내자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올해 거의 매달 잡혀있는 빡빡한 해외출장 스케줄도 그 결정을 내리는데 한몫한 것은 물론이다.


한겨울에 과연 세가 나갈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집을 내놓은 지 얼마 안 되어 우리 집이 마음에 든다는 한 신혼부부가 나타났다. 아기자기한 살림살이로 가득한 우리 집에서 신혼을 즐기는 건 생각만으로도 참 행복할 것 같다. 모든 가구와 살림살이를 갖춘 우리 집이라면 몸만 들어와서 제주에서의 신혼을 즐길 수 있을 테니 짐을 빼지 않아도 되는 내게도, 굳이 새롭게 살림살이를 마련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에게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이렇게 모든 게 계획대로 척척 되어가는 중인데 내 마음은 이상하게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한동안 우리 집에 올 수 없다는 사실이 꼭 사랑하는 반려견을 남의 집에 보낸 기분이다. 계약서를 쓰고 그분들에게 전해줄 우리 집 사용 매뉴얼을 꼼꼼히 작성해 본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을 만나면 집구석구석을 돌아보며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분들이 이런 내 생각을 알게 된다면 너무 깐깐한 주인을 만났다며 질색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내는 동안 문제없이 편안하게 살기 위한 내용을 알려주는 건 주인의 본분 아니던가.

꼼군은 이런 나를 보며 집에 쏟는 애정을 좀 줄이라며 혀를 끌끌 찬다. 햇수로 완공된 지 어느덧 6년이 넘어가는 이 집에 아직도 애정이 그렇게 많냐며 신기해한다. 그러나 내겐 어릴 적 상상만 하던 꿈이 그대로 실현된, 그야말로 언덕 위에 새하얀 그림 같은 공간이다. 그래서 이 집이 더 낡아져 더 이상 하얀 집이 아닌 날이 와도 내 애정이 식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는 이 집이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는지 계속 상기하며 그 결과를 누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제주가 이렇게나 가까웠던가. 몇 자 글을 끄적이는 사이에 벌써 비행기는 착륙 준비로 요란하다. 전에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제주땅을 밟는다. 눈 감고도 구분할 수 있는 제주의 부드럽고 상쾌한 공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온다. 이 맑은 공기를 한껏 음미하며 침울해진 내 마음을 달래 본다. 1년간 우리 집에 머물 분들께 당부할 말을 잊지 않도록 계속 되뇌며 우리 집과 작별의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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