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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시 Apr 16. 2022

삶은 기억을 인용한다

바닷가 조개껍데기에서도 별을 찾는 마음이란.

일곱 살 때 보았던 밤하늘을 아직 기억한다. 가족과 외식을 끝내고 차에서 내리던 때, "별똥별이다-!" 하고 외치던 언니의 말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었다. 순간, 마음속에 '예쁘다'와 '빽빽하다'는 감상이 함께 자리 잡았다. 예쁘지만 별똥별을 찾기엔 그 빽빽한 별들이 거슬렸다. 결국, 나는 별똥별을 찾지 못하고 부모님을 따라 집에 들어가야 했다. 그날의 밤을 떠올릴 때면 '그때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둘걸', 하고 아쉬워한다.

   

나는 버스로 10분이면 도착하는 바닷가 근처에 살았기에 저녁이면 집에서 근처 방파제까지 걷곤 했다. 불빛이 적은 바닷가는 보기보다 별똥별을 관찰하기 쉬웠고, 댓 번은 빌었을 소원들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다. 별똥별을 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별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바라보는 방향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별들. 별이 아닌 것을 쫓다 진짜 별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어떤 날은 달이 밝은 탓을 하기도 했고, 내 머리 위의 가로등을 탓하기도 했다. 관측하기 쉬운 오리온자리가 보일 때면, ‘있을 때 잘하지!’라는 말이 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칸트는 ‘현존하지 않음에도 대상을 마음에 떠올리는 능력’인 ‘구상력’이 우리에겐 존재하며, 이를 ‘생산적 구상력’이라 보았다. 생산적 구상력은 우리의 기억과정이 이전의 경험적 기억을 통해 대상을 재구성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물을 떠올리기 위해 그것의 색상과 모양, 질감을 다른 B나 C라는 사물에서 조금씩 인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에 가까운 구상력 때문에 간혹 기억하던 사물의 모양과 색상이 실제와는 다른, 기억 오류가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떠올리는 일곱 살 무렵의 밤하늘도 하늘의 색상과 별의 배치는 실제 그때의 밤하늘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과학책에서 혹은, 날이 맑은 곳에서 본 또다른 밤하늘들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처음은 별똥별을 보기 위해, 이후에는 별들의 모임을 보기 위해 방파제로 향했던 나는, 어느덧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칸트철학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목적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참조 사항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게 된 건 어릴 적부터 꾸준히 봐왔던 바다가 별똥별을 쫓던 때처럼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지 않길 바라는 무의식의 작용일지 모른다.


빼곡한 별들의 밤을 잃고서 바다를 사랑하게 된 내가 처음 부산 다대포 바다에 갔을 때, 일곱 살의 밤하늘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방파제의 바다보다 지형지물이 훨씬 적고 발밑까지 밀고 들어오는 물결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당혹스러운, 어쩌면 두려운 감정이기도 했다. 노을 지는 바다를 한참이고 바라보다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발아래 부서진 조개껍데기들이 눈에 거슬렸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박혀있는 것이 그때의 별들 같았다. 나의 어색한 인용과 지질한 별 사랑에 용기라도 주는 듯, 그날 찍었던 많은 사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이 혹시나 해서 찍은 조개껍데기 사진이었다.


다대포해수욕장의  조개껍데기가 별이 되는 순간 / @haesi0720


기억은 유한하다. 그 어떤 사진과 영상도 완벽한 기억이 되어주진 못한다. 소중한 추억도 언젠가는 무뎌지고 잊힐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의 인용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흔적을 남긴다. 더 나은 선택을 위해, 다른 사물과 사건들로부터 비슷한 특성을 인용하면 할수록 기억은 강렬해지고 동시에 왜곡된다. 그런데도 특정하여 떠올린 밤하늘이 ‘그때의 밤하늘’이라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까닭은 내가 그 하늘을 보았다는 확실한 경험과 추억하기 위해 수없이 재구성해왔던 기억의 인용이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어서다. 우리의 구상력이 '재생적'이기만 했다면, 단순히 과거의 기억만을 재현하며 고울 대로 고아버린 맹물 육수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어떤 추억은 왜곡의 과정을 거쳐 감정이 감동의 영역이 되고, 거기서 탄생한 새로운 인용이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조개껍데기조차 별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커버사진: Photo by Timothée Dur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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