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것 같은 감정이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올해로 서울에 계신 부모님을 떠나 제주로 오게 된 지 7년이 지났다. 이 울렁거림은 부모님을 향한 마음이기도 두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된 마음이기도 했다. 하얀 A4용지에 검은 글씨가 빼곡해질수록 글자의 굴절이 심해졌다.
82세 현춘할머니(가명)는 제주의 해녀다. 바다 물질로 세 아들을 키우신 할머니의 손은 스마트 폰의 작은 화면 속 한글문자판을 누르기에 거칠고 두터웠다. 화면을 가볍게 터치하는 것도, 손톱만 한 문자판을 정확히 누르는 것도 할머니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꾹 2초 동안 누르면 문자키가 숫자로 변환되는 기능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할머니를 만나며 알게 됐다. (이 기능 없앨 수는 없나)
“ ‘가’를 쓰려면 ‘ㄱ’을 누르고 ‘ㅣ’를 누르고 ‘•’을 누르면 돼요.”
핸드폰 속 낯선 한글키보드는 한글을 다시 배우는 일과 같았다. 그렇게 두 번째 시간이 지나 드디어 수신인을 지정하여 문자를 보내는 시간이 왔다. 꼭 필요한 사람만 저장된 할머니의 연락처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있었다. 할머니의 손가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ㅎ’까지 화면을 내려갔다. 지난 2주간 문자 보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보낼 곳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할머니의 첫 문자를 받게 될 수신자는 육지에 있는 막내아들이었다.
첫날은 ‘지금공부중’ 띄어쓰기 없이 다섯 글자를 보냈다. 할머니는 지난주보다 신중하게 문자키를 눌렀다. 바닷속 소라를 잡아 올리는 일만큼이나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순간이 었다. 10초쯤 흘렀을까.
헉!
엄마의 첫 문자를 받은 아들의 외마디가 도착했다.
함께 문자를 확인한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문자알림음이 울렸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
현춘할머니는 문자를 읽어주며 살가운 아들과의 일화를 들려주셨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아들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는 ‘지금공부중’ 이 다섯 글자가 적힌 종이를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으셨다.
이틀 후, 다시 만난 현춘할머니는 얼굴을 보자마자 손을 잡고 “이제 이거 말고 여기에 다른 말 또 써 줘” 지난 시간보다 더 꼬깃해진 다섯 글자가 적힌 종이가 펼쳐졌다. 구겨진 종이를 보며 얼마나 많이 연습하셨을지 짐작해 본다.
"어떤 말을 보내고 싶으세요? 제가 써드릴게요."
"아무거나~"
펜을 쥔 내 손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걸 보며 할머니가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손톱보다 작은 처음 보는 키판사용법을 알려드리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할머니가 하고 싶은 말을 찾는 일이었다.
‘ 바다에 간다. 문자 배우는 중이다. 오늘 제주에는 비가 온다. 비 올 때 운전조심해라. 아프면 참지 말고 병원 가라. 밥 챙겨 먹어라. 보고 싶다 아들아.’ 종이에 적어 내려가던 말들을 눈으로 따라가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부모가 자식에게 보내고 싶은 말이, 자식이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과 다르지 않음을 마음이 알아챘다.
할머니의 주머니 속 A4용지는 3장으로 불어났다.
불어나는 할머니의 A4용지를 볼 때마다, 그동안 해야 할 말만 전하며 사는 세상에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놓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