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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살 Mar 20. 2022

배리어프리 연극을 보다

[리뷰]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공연]


값진 배리어프리 공연



동행자는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거의 울뻔했다고 말했다. 공연의 다분한 친절함 때문이다. 하지만 그 친절함이란 누군가에게는 의무의 지연일 뿐일 테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공연장에서 함께 놀 수 있는 문화는 없었다. 비장애인에게도 난해한 연극 공연은 장애인에게는 더 답답하고, 어렵기만 하다.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은 연극 시작 전 모든 배우가 자신의 목소리와 이름, 옷차림에 관해 설명한다. 연극에 사용되는 노래 한 곡, 한 곡, 배우가 달리는 소리, 무대의 소품들에 대해 하나하나 친절한 설명을 더한다.


배리어 프리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배리어 프리란 "장벽을 없앤다"는 뜻으로 고령자나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장벽을 없애는 게 목표다. 공연 문화에도 배리어 프리는 필요하며 요즘은 차차 공연장의 배리어 프리 움직임이 보인다.


배리어 프리 공연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개방형 배리어 프리 공연이다. 공연장 한 켠의 공간에서 동시에 수어 통역을 진행하는 경우 혹은 큰 스크린에 배우의 대사, 효과음, 배경음악 등의 자막이 나타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두 번째로 폐쇄형 배리어 프리 공연도 있다. 음성해설을 지원하는 공연의 경우 수신기를 받아 수신기에 이어폰을 연결해 음성해설을 듣게 된다. 또 개방형 스크린 자막 지원과는 달리 특정 좌석 앞에만 화면 해설 수신기가 배치된 폐쇄형 형태가 있다.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은 개방형 배리어 프리 공연으로 공연장의 거대한 스크린에 배우의 대사, 효과음, 배경음악의 자막이 나타난다. '함께'의 가치를 인지하고 있는 본 공연 관계자들의 사려 깊음에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이 공연에 큰 호감을 품게 되었다.



희주의 철봉




연극을 보며 사랑하게 된 캐릭터는 주인공인 '희주'와 '준호'다. '희주'는 낮에는 학교에서 철봉에 매달리며 체대 입시를 준비하고, 밤에는 맥도날드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학교에서 그 누구도 희주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여성스럽'지도, '학생 답'지도 않은 그녀는 학교의 이방인 같다.


학교는 이방인이 되기 가장 쉬운 공간인지 모르겠다. 단순히 누군가의 눈에 잘못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따'가 되기 십상이고, 다른 아이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 기필코 '외톨이'가 되고 마는 잔인한 공간이다.


희주는 매일 철봉에 매달린다. 철봉에서 1분을 버텨야만 원하는 대학의 입구에서 서성일 자격이 부여된다. 하지만 희주는 30초도 매달려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떨어지면 뭔가 아쉬워. 다른 애들 하는 거 보면 누가 밑에서 잡아주는 거 같고, 누가 옆에서 응원해주는 거 같거든. 나도 그러면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희주에게는 밀어주고, 잡아주는 사람이 없다. 희주에게 철봉에 매달려 있는 1분 남짓의 무게는 친구들, 가족들이 함께 짊어져 줘야만 버틸 수 있을 만큼 무겁다. 희주는 "그딴 거 다 필요 없다"며 악으로 깡으로 철봉에 매달려 버틴다.


희주에게는 어디서 비롯된 지 알 수 없는 뒤틀림이 생겨났다. 학생으로서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지원을 받으며 공부해 전념할 수 있는 '민지'에게 느끼는 열등감, 내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기분 나쁜 절망감, 무시와 거절에 익숙해진 열패감.


희주가 '준호'의 레오타드 사진으로 그를 협박한 것은 그런 뒤틀림에서 비롯된 행동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이 충분한 것은 아니다. 희주는 준호가 자신과 닮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 학교의 이방인. 다른 아이들 속에 완전히 섞여들 수 없는 독특한 아이. 희주는 뒤틀린 방식으로 준호에게 친구 신청을 걸었다.



준호의 레오타드




준호는 레오타드를 입는다. '선'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나 그저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을 자신이 레오타드를 입은 모습에서 발견한다. 레오타드에 대한 그의 집착적 애정은 병적이지 않다. 오히려 병을 고치기 위한 약에 가깝다. 레오타드는 그의 학업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무엇보다 준호는 레오타드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 모습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하기도 하다.


희주는 준호에게 묻는다.

"너에게 레오타드가 없어도 네가 버틸 수 있을까."

철봉에 매달려 간신히 30초를 버티고 있는 희주는 준호가 부러워 보인다. 버틸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걸 희주는 누구보다 잘 안다.


준호는 자신이 레오타드를 입은 사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체육 수행평가 시간, 그는 교복을 벗어 던진다. 레오타드를 입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늘 잔뜩 얼어 있는 모습의 준호가 레오타드를 입으면 그 누구보다 밝은 미소를 짓는다.


그는 남들 앞에서 한 번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레오타드를 숨기는 대신 홀가분하게 벗어버리기를 선택한다.


그런 준호의 용기 때문일까, 희주는 드디어 철봉에 30초 동안 매달릴 수 있게 된다. 그의 용기는 비단 준호만의 것이 아니다. 준호의 용기는 세상의 모든 이방인을 향한 응원과 환대다. 그의 응원 덕에 희주는 철봉에서 30초를 버틸 힘을 얻는다.

그리고 준호는 학교를 떠난다. 학교에서 그가 외톨이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학부모 대표를 자청하는 그의 엄마는 학교에서 떠도는 준호에 대한 소문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연극은 소수자들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을 내놓지도, 모든 게 해결된 해피 앤드를 내놓지도 않는다. 다만 무대 위 아이들을 오래오래 지켜보겠다는 다정한 다짐처럼 느껴진다.



극단 돌파구가 만드는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은 변화를 거듭했다. 극단의 이름처럼 그야말로 돌파구를 찾아, 같은 극본도 시대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결과적으로 초연이었던 2015의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과 2022년의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은 완전히 다른 연극이 되었다.


성장하는 사람들과 성장하는 이야기는 늘 반짝거린다. 매주 스터디를 하며 변화하는 시대의 고민을 담아낸 극단 돌파구의 시선 덕에 가능한 연극이었다. 문화예술은 조금 더 친절하고, 따뜻해도 된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8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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