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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ong Jun 15. 2016

망쳐버린 사진, 언어.

서투른 시읽기 #8 고은 <다시 은유로>

다시 은유로 / 고은


아이야


너를 말하기에 내 은유밖에 없다니

너를 말하기에

썩어가는 내 은유밖에 남아 있는 것 없다니

아직껏 말할 줄 모르는 아이야

다섯살 여섯살인데도

아직껏 말할 줄 모르는 아이야


얼마나 좋으냐

(...)

아이야

아이야

너를 에워싼

소위 근대 보편의 은유들 너무나 오래되었다


말할 줄 모르는 아이야

네 언어 이전의 그 미지의 은유 어서 찾아라

아이야

아이야


중학교 3학년 때 입시 학원에서 시를 쓰고 고은 시인의 시집 <허공>을 선물로 받았다.

고등학교 내내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르겠다. 

점심시간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만인보>를 조금씩 읽어 갔다.

안타깝게도 졸업 때까지 다 읽지는 못했다. 뭐,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이등병 때 유일한 읽을거리였던 중앙일보에 고은 시인의 인터뷰와 편지가 가끔 실렸다.

고은 시인은 '초월'을 이야기했다. 아무개가 선언하는 뉴에이지나 자연주의적 외침이 아니었다.

분명히 도달한 경지였다. 까마득했다. 


그리고 2년, 2년간 있던 조직 생활을 떠나며 사진 작업을 시도했다.

글로 쓸 수 있었지만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었다. 

'은유'하고 싶었나. 어쩌면 첫 예술을 해볼 수 있겠다는 욕망도 있었다.

시험 촬영 결과 쓰레기 같은 사진들이 찍혔다. 상상 속의 결과물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남겨졌다.

구상은 훌륭했다. 대상에 대한 기존 개념을 부수고 싶었고, 더 큰 개념으로 '환유'하고자 했다.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연쇄되는 질문의 시발점이 되는 그런 작업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물은 '직유'였다. 혐오하던 기존 이미지를 답습하고 강화하는 사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원시의 언어를 그리워한 발터 벤야민은 이를 '아담의 언어'라고 불렀다고 했나. 

언어와 대상이 일치하는, 너를 부르면 네가 현존하는 그런 언어. 

'말할 줄 모르는 아이'의 '언어 이전의 그 미지의 은유'가 이와 통하겠다.

역시 아득하다. 그들은 이 초월을 지향하겠지만 난 아직 단계가 남아있다.


표출될 출구를 찾는 상상의 찌꺼기들이 쌓여 간다.

이 찌꺼기들이 온전하게 현존하는 표현을 구사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어디 쉽겠는가.

원본 그대로 현존할 수 없다면 당장은 온갖 표현 수단, 비유를 통해 재현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당분간 '썩어가는 은유'가 내 유일한 도구일 테다. 그마저도 이번에는 포기해버렸다.

사진을 통해 해볼 수 있으리라 오만했지만 쓰레기 같은 직유로 인해 내 생각은 오해되었고, 

은유와 환유에는 도달조차 못했다. 매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표현 방법에 대해 성급했다.  


발상과 고민은 나쁘지 않았다. 실력이 없었을 뿐. 

생각은 사진이 안된다면 글로라도 남길 것이고, 애초에 연출사진에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타격이 클 것 같다. 그동안 쉽게 느껴졌다면 이제는 어려울 차례인 까닭이다.

평생 시를 써온 시인은 현실의 언어에 머무르는 자신의 은유를 저주하다시피 한다.

그 썩어가는 은유라도 지니기 위해 나는 한동안 괴로워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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