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씨에는 부지런히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머지않아 무더운 여름이 찾아올 테고, 공기의 온도와 습도가 지금의 그것과 퍽 다를 것이므로.
지금이 바로 제철을 누릴 적기다.
Y와 경주에 갔다.
월요일 오전 11시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느 독립서점이었다. 한적한 동네의 낡은 건물 2층. 오래된 나무바닥은 발을 딛는 곳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서가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가득했다. 손을 뻗으면 겨우 닿을 높은 곳에 존버거가 있었고, 메리올리버와 제임스 설 터, 박연준과 레이먼드카버, 최은영과 은유, 문학동네시인선과 아무튼 시리즈가 빼곡했다. 교보문고에 가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스쳐가는 서가가 대부분인데, 이곳의 모든 책들은 마치 나를 위한 큐레이션이었다. 한 권 한 권, 모든 책의 등을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녹차를 마시며 공유서가에서 집어온 책을 읽었다.
Y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때때로 각자의 독서를 한다. 같은 시공간에 머물며 '따로 또 같이'를 물흐르 듯 실행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친구는 Y가 유일하다. 서로 배려하며 그 안에서 편안한 우리는 정말이지 귀한 인연이다. 창밖이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각자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장님의조심스러운 발소리, 나무바닥 소리,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엘피판을 갈아 끼우는 소리가 유일한 소음이었다. 감미로웠다.
등받이 없는 나무 스툴에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로 햇살이 일렁였다. 창밖의 가로수 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그림자였다.
바람이 분다. 나무가 움직인다. 잎이 흔들린다. 따뜻한 차를 마신다. 책을 읽는다. 나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평온하게 살아있다는 감각이었다.
원래 가려고 봐 둔 식당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별 고민 없이 서점 건물 1층에 위치한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빵을 파는 카페식당이었다. 조금전 서점에 들어갈 때 본그식당 안의 풍경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좋았던 걸 기억했다.
소스가 거의 없는 재료 본연의 맛이 담백했다. 요즘 나는 이런 음식이 먹고 싶었던 것 같다. 짭짤한 치즈와 결이 살아있는 빵, 수제버터의 풍미와 조화가 훌륭했다. 마주 앉아 음식을 나눠먹던 우리의 표정도 분명 좋았을 것이다.
먹었으니 걷자며 간 곳은 대릉원이었다.
한낮의 햇살이 따사로워서 차 트렁크 속 우산을 찾아 꺼내 들었다. 대릉원 내에는 단체 소풍을 온 듯한 남자고등학생들과 삼삼오오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있었다.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 이곳은 말하자면 공동묘지일 텐데 그 정취는 포근했다. 오래된 것이 주는 아득함과 아늑함이 있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었다. 쏟아지는 햇빛을 나무가 가려주었다. 고개를 드니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이 눈부셨다.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빛을 오래도록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에는 구름도 아기자기했다.
이 한적한 평일에 대릉원을 걷다니. 이렇게 완벽한 날씨를, 햇살과 공기와 바람을 누리다니.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차올랐다. 내게 주어진 삶을꽤 잘 살고 있다는 만족감이었다. 조금 사치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평화롭고 행복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부지런히 계절을 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Y는 계절적 풍류를 아는 사람이기에 내가 배울 점이 많다. 김신지 작가의 <제철 행복>이라는 책을 봤을 때도 Y를 떠올렸었다. 작가는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제철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오늘처럼제철을 만끽하는 시간을 촘촘히 만들어야겠다.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더 느슨하게 시간을 흘려보낼 것이다. 그것이 곧 행복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