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원정대 이전에 사자왕형제가 있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
어린이 책 치고는 분량이 상당(약 300페이지)하지만 그만큼 흥미진진한 내용이 펼쳐지기 때문에 지루할 틈은 없다. 오래전에 번역된 텍스트라 우리말이 다소 옛스러운데, 그 덕분에 더욱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저자가 할머니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야기 속에서 열 살인 주인공 칼.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형 요나탄이 있다. 아픈 아이인 칼은 오래 살지 못할 상태이다. 반면 형은 건강하고 아름답고 용감하고 친절하며 모든 방면에서 우수하다.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요나탄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픈 동생을 온 마음을 다해 돌보는 다정한 요나탄은 칼의 전부이다. 형제의 깊은 사랑이 너무 애틋하여 슬플 정도이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난다. 불이 난 집에서 동생 칼을 구한 요나탄 형이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부에서부터 칼의 죽음을 암시하더니 갑자기 형이 죽어버리다니.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얼마 후 칼도 세상을 떠나고, 둘은 죽음 이후의 세계 ‘낭기열라’에서 재회한다. 형제의 모험이 마침내 시작되는 곳이다.
낭기열라에서 칼은 건강한 아이의 모습이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낭기열라는 일종의 낙원처럼 보이지만 그곳에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이 존재한다. 텡일이라는 잔인한 인물은 괴물과 군사를 거느리며 죄 없는 사람들을 약탈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서슴없이 죽인다. 요나탄은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텡일을 몰아내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쓴다. 칼은 그런 형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본다. 작가는 칼이 느끼는 감정 중 특히 두려움과 공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형 뒤에 숨어있던 연약하고 겁 많은 아이가 용기를 갖게 되는 순간과, 그들에게 찾아오는 끝없는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함께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다. 그 옛날, 작가는 어린이들을 위해 어떻게 이토록 극적인 모험을 설계했을까. 2000년도 이후 등장한 숱한 판타지어드벤처시리즈의 원형이 이 책 속에 담겨있으니, ‘고전장편동화’라고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을 필독서의 목록에 올려두고 싶다.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밤,
요나탄 형이 죽는 장면에서 아니나 다를까 담이는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열 번 읽어주면 열 번 다 오열하는 아이다.) 보리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엄마, 나도 죽으면 낭기열라에 갈까? 우리 가족도 거기서 다 만나면 좋겠다. 거기 가면 상할머니도 있겠지?
개정판에는 책의 말미에 ‘여름의 소년들에게‘라는 짧은 글이 실려있다. 글에서 누군가가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언제 어떻게 읽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선명한 기시감이 있었다. 절반정도 읽고 알았다. 아스트리드 린드 그렌의 동화로부터 광주 민주화항쟁을 가로지르는 그 서사는 바로 한강 작가의 글이었다. 문학이 가지는 힘 - 서로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가치로 결탁하는 - 은 연령을 불문한다는 사실과, 훌륭한 텍스트는 언제나 인간의 존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