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5
「‘좋아하는 것’이라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간을 쓰러 다녔고, 직업인으로 돈을 벌면서 시간에 돈까지 보태던 나였다. 남들 다 하는 것부터 ‘독립’이 붙은 남들이 잘 모르는 것들까지. 시간에 돈까지 쓰는데 아깝지 않았고. 취미를 채집하는 사람처럼 나만의 표본실에 그것들을 진열해 놓고 스스로 살짝 취해있었다.」 이렇게 겨우 한 문단 쓰고 마음을 다지는데... 정면으로 보이는 싱크대가 날 보며 온 얼굴로 울고 있다. 그래 일단 ‘치우자’ 싱크대 안 널브러진 당근 껍질과 시금치 잔해부터 처리한다. 세제 거품을 내기 전 음식물쓰레기부터 치우는 게 시작인데 그래야 설거지하는 동안 물이 고여 음쓰가 토할 일이 없고, 환경에도 좋단다.
싱크대 수전을 올려 물을 튼다. 내 귀에는 92914의 Okinawa 파도소리 같다. 세울 수 있는 접시나 쟁반, 아이 식판 같은 것들이 1번. 포갤 수 있는 공기들은 2번이다. 포갤 때는 큰 공기가 밑에 가야 물이 빨리 마른다. 수저나 집게 국자 같은 조리도구가 3번인데 이때는 수전을 젤 끝으로 돌려 온수로 차락차락 씻어낸다. 가끔 무심결에 넣은 젓가락들이 같은 방향으로 누워 있을 때가 있는데 젓가락이 주는 기쁨이자 행복이다. 오늘은 행복이 거꾸로 누웠네... 싱크대 주변 물기를 닦고 수세미에 행주까지 빨아 널었다. 이제 써볼까 싶은데... 배꼽을 중심으로 컴퍼스 다리를 최대한 벌려 돌린 거 마냥 옷이 다 젖어있다. 설거지 중 8할이 젖는 편이라 엄마가 상업용 방수 앞치마를 얻어 줬다. 길이가 거의 발목까지 와 옷은 안 젖는데 물이 앞치마를 타고 흘러 발을 적신다. 회센터도 아니고 장화까지 신을 수는 없잖아. 마음은 급한데 오늘은 팬티까지 젖었으니 말 다했다, 일단 ‘씻자’ 훌러덩. 머리를 감으며 게으른 나를 자책한다. 마감시간은 이미 지났다. 씻자! 씻자! 헉 화장실 바닥에 물이 가득 찬다 오늘이 장날이구나. 감은 머리는 상투를 틀어 올리고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다. 화장실 청소의 모든 날 모든 순간 머리카락이 늘 문제였는데 오늘도 역시나. 순간 옛 기억이 떠오른다. 홀딱 벗은 몸으로 락스를 부어가며 변기를 청소하던 울 엄마. 씻다 말고 청소냐며 투덜대던 나였는데 그 투덜이가 자라서 나체로 화장실 청소를 즐겨하게 됐다. 씻다 말고 이렇게 열심히 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마음이 벅차오르는 건 왜일까... 새벽 1시가 넘었다. 게으른 나는 초조함에 우는데 정돈된 주방이며 화장실이 웃는다. 그 너머로 내가 만든 표본실이 보인다.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의식한 취미들이 진열돼 있다. 물음에 답하기 위한 취미들은 부끄럽다. 씻고 나온 내 몸처럼. 그러고 보니 나 좀 즐기는 것 같잖아...
그래 오늘부터 내게 취미를 물어본다면 ‘청소’라고 쓰겠다. 다만 게으른 편이라고 해야 마음이 좀 편할 것 같다. *음쓰 –음식물쓰레기
*92914는 가수 Okinawa는 곡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