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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카모토 미깡 May 12. 2020

어떤 물음

너는 일본인이야, 한국인이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분명 중학교 때 수업 시간이었을 거다. 글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상관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라고, 그 말에 위안을 얻는 한편으로 생각했다.



 독도가 한국 땅이야, 일본 땅이야?


 이 물음의 의도를 나는 알고 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다. 내 생각이 정말로 궁금한 것도 아니다. 동반되는 엷은 미소가 무얼 말하는지, 왜 유독 내게만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것은 나의 ‘비정상적인’ 출생으로부터 기인한다.

 1910년부터 1945년 광복절까지 약 35년에 걸친 일제의 식민통치는 비정하고 잔혹했다, 라는 것을 나는 배움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나를 미워했던 것은 아마도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을 가졌거나 아주 가까이에서 전해 들은 분들이 그 아이들 집에 있었기 때문일 거다. 이따금 “일본 놈아, 한국한테 사과해.” 따위의 소리를 들을 때면 “나 일본 놈 아니거든!”하며 맞섰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대답을 두 번 세 번 반복할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이 점점 커져갔다. 무의식의 영역에 존재하던 그것은 이윽고 의식의 영역으로 침범하여, 어떤 물음의 형태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정말 천하의 나쁜 일본 놈일까?

 집에 돌아가면 나는 일본인 아버지와 일본어로 대화를 했다. 한국인 어머니와는 한국어를 썼다. 방에 들어가면 책상 위에 놓인 액자 속에서 일본인 할머니가 웃고 있었다. 할머니는 정말로 좋은 분이셨다.

 나는 종종 하늘나라에 계신 할머니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었고 무언가 생각할 때에도 일본어를 사용하곤 했다. 그렇다고 한국어가 늦진 않았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한국어로 수업을 듣고, 한국어로 시험을 봤다.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다.

 아버지는 지극히 평범했다. 약간 나이가 많고, 조금 자존심이 세고, 다소 가부장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는 가족에게 헌신적이며 지나칠 정도로 성실했다. 말 한마디마다 썰렁한 농담을 하나씩 던지고는 반응이 없으면 섭섭해하는 점은 조금 귀찮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정말로 웃긴 이야기를 해주었다. 키가 조금 작다는 것과 일본어로 말하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것 없는, 좋지도 싫지도 않은 아버지였다.

 집 밖에서는 어딜 가나 일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했다. 일본에 큰 지진이 났을 적에는 이번 기회에 일본인들이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길 가다가도 들었다. 중학교 때 사회 시간에는 누군가 일본이 쓰나미로 떠내려가거나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겨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아이들은 모두 깔깔거렸고 선생님도 별말 없이 웃어넘겼다. 나는 일본에 있는 큰아버지와 고모, 고모부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보다는 울음이 나왔지만 숨을 죽였다. 무서웠다. 모두가 퍼붓는 저주가, 손가락질이 나를 향할까 봐.

 물 위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처럼 그 속에서 나는 철저히 외톨이였다. 누군가 던진 돌멩이에 간지럼 타듯 동심원을 그리며 출렁이는 물결에도, 그저 동동 떠다니는 기름 한 방울.

 고등학교 때 역사 공부를 열심히 했다. 특히 한국사가 재밌었다. 마치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일대기를 체험하는 것처럼 그 삶에 들어가 가슴을 뛰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근현대사 수업에 접어들면서, 일제강점기에 대해 자세히 배웠다. 어떤 방식으로 일제의 국정 간섭이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국권을 찬탈당하기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계속되는 비인간적인 수탈과 통치… 지독했다. 매시간마다 “나쁜 놈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하나의 국적을 선택하기 전까지 나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누군가 비웃을 것만 같다. 네가 왜? 넌 한국인도 아니잖아-하고.

 혼혈. 하프 블러드 (half-blood). 말 그대로 반쪽짜리인 것이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반쪽짜리 한국인, 반쪽짜리 일본인, 반쪽짜리 인간…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직접적으로 나를 공격하는 사람은 줄어들었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게 죄스럽게 느껴졌다. 모임 자리에서도 한일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숙였다. 스쳐가는 말 한마디도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스물두 살 먹은 지금도 그렇다.

 정체성의 혼란에서 오는 불안감을 숨기려고 오히려 악을 쓰며 누가 뭐래도 나는 한국인이라고 오기를 부린 적도 있다. 어엿한 한 사람 몫을 하는, 그보다 더 뛰어난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독하게 공부했던 적도 있었다. ‘토종’과의 경쟁은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과도 같았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가 태어난 땅은 이웃한 섬나라이며 그곳에 나와 피가 섞인 사람들이 있고, 그곳에서 나고 자란 남자가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또, 내가 그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나 나는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땅 위의 많은 것들 역시 사랑하고야 말았다. 새카만 머리칼에 나보다도 키가 작은 나의 어머니, 오랜 시간 나를 품어준 집, 집을 품은 작고 낡은 동네, 새벽녘의 분주함과 늦은 밤의 왁자지껄함, 한강을 따라 난 산책로, 그곳을 걸으며 맡는 봄바람의 포근함, 여름의 비릿함, 가을의 헛헛함, 겨울의 무정함. 그리고 이십 년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쌓은 소중한 인연들, 그들과 나눈 사랑의 말, 나눈 진심, 삶의 한 조각.

 두 나라의 관계 속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날은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오지 않으리라. 매번 고민하고 아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스스로에 대해 의문이 드는 날이 오면, 이제는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묻는 대신에 다른 물음을 던져 보려 한다.

너는 한국을 사랑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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