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미 최 사카모토 Aug 15. 2024

글 속에 가둔 시간

여섯 번째 기록

2024년 6월 5일 수요일

 

 오전 8시. 경차를 고집하던 여느 때와 달리 소형 SUV에 몸을 싣는다. 뒷좌석에 짐을 싣고 운전석에 앉아 시트를 조절하고 시동을 건다. 긴장을 달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어 본다. 운전해서 청주로 가는 네 번째 여정이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다. 내가 속한 유튜브 팀원들이 아빠의 병원에 동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한 달 전쯤부터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졌다. 치매가 아닐까 싶을 만큼 심했던 섬망 증세가 차츰 잦아들고, 천천히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고, 한 마디씩 입을 뗄 수 있게 되고, 직접 요플레를 떠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아빠를 요양원으로 모실지 집에서 돌볼지 고민하던 엄마도 호전되는 아빠의 모습을 보다 보니 아직은 차마 요양원에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요양원은 전문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하거나 가족들이 환자를 돌볼 수 없는 경우, 즉 건강 문제가 심각한 환자들이 주로 입소하는 노인의료복지시설로, 치료를 위해 잠깐 머무르는 병원과 달리 여생을 그 안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다. 환자와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결혼 이후 경제 활동 이력이 전무한 엄마는 아빠가 쓰러진 뒤 아빠를 집에서 모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요양 보호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자식 된 입장에서도 외국인 신분의 아빠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은 데다, 시골집에서 죄책감을 안고 홀로 지내게 될 엄마를 위해서도 엄마가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집에서 아빠를 모실 수 있게 될 때까지 최대한 재활 치료를 진행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몇 주 전부터 본격적으로 재활병원을 찾아다녔다. 재활 시스템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고 가격도 적당한 병원을 청주 시내 쪽에서 발견해 입원 상담을 하는데, 퇴원 수속을 밟고 소견서를 받기 위해서도 주치의 면담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주치의는, 중환자실과 진료실에서 내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 남자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도 몇 번인가 면담을 했고 그를 마주했지만, 그 얼굴을 보거나 머리 숙이는 게 괜찮아서는 아니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나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면담을 마치고 진료실을 나오면 비참함과 억울함과 분노와 두려움이 우르르 들끓었다 뒤섞였다 쏟아져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내가 병원에 가기 싫은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아빠의 퇴원을 위해 그 감정을 또다시 고스란히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니 괴로웠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번 주 수요일, 유튜브 팀 회의를 마치고 다 같이 식사 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병원 한 번만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 그렇게 시작된 팀원들과의 여정. 내가 운전하는 차에 네 명을 더 태우고, 서울에서 청주까지 왕복한다. 본격적으로 운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내 손에 팀원들의 명운이 달려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되지 않을 리가. 약속 장소에 향하는데 손에 땀이 났다. 핸들이 왜 이렇게 뜨겁지. 알고 보니 핸들 열선이 켜져 있었다. 끄는 방법을 몰라 한참을 애먹다 기어 옆쪽에 있는 버튼을 발견했다. 레이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카셰어링 어플에 “신차”라고 쓰여 있던데 그래서 그런지 부가 기능이 이것저것 달려있다. 차 폭도 달라서 차선을 꽉 채우는 감각이 다소 낯설었다. 쫄지 말자. 운전 연수도 비슷하게 생긴 코나로 받았으니 별로 다를 것 없어. 길을 잘못 들지 않게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신도림역 2번 출구 앞 민영 주차장에 무사히 주차한 후 커피를 사러 갔다.

 

 팀원의 아빠 병원에 동행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새삼스럽게 옷차림도 생김새도 키도 각양각색이다. 키는 최단신 155센티미터부터 최장신 194센티미터까지. 여자 셋 중 한 명은 핏 되는 청바지에 연분홍 티셔츠를, 한 명은 녹색 패턴 원피스에 선 캡을, 한 명은 청바지 위에 레드 컬러 원피스를 레이어드 했다. 남자 둘은 셔츠에 슬랙스라는 점은 비슷했지만, 위아래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최장신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겼다. 참고로 나는 여기에서 최단신 겸 최연소자를 맡고 있다.

 

 휴일 전날이라 그런지 아침 9시인데도 차가 많이 막혔다. 조수석에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앉아 네비 보는 것을 도와주었고 뒷좌석에 세 명이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은 최장신 남자와 수다를 떨다가 뒷좌석의 대화에 가끔 끼어들곤 했다. 3시간 30분이 금방 갔다고 할 순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니 장시간 운전도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예약한 병원 맞은편 한식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팀원들에게는 닭백숙을 대접했고 채식을 하는 나는 보리 비빔밥과 두부 부침을 먹었다. 밑반찬으로 나온 가지가 아주 맛있었고 두부 부침의 부들부들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닭백숙에 딸려 나온 녹두밥은 꼭꼭 씹을수록 고소하고 달콤했다. 팀원들도 연신 맛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사장님이 서울에서부터 오느라 고생했다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주셨다. 나는 성분상 비건인 스크류바를 집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 아작아작 으깨 먹는 아이스크림이 별미였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고 하던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의사 면담부터 신청했다. 판본승 환자 보호자님- 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옆의 두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풉. 낯설고 어색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든든함. 가슴을 활짝 펴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재활 병원에 입원하려고 하는데 다음 주 토요일에 퇴원할 수 있는지, 필요한 서류는 어디에 언제까지 요청하면 되는지 의사에게 물었다. 그는 어제 찍은 CT를 보여주며 출혈된 혈액은 모두 흡수됐고 신경외과적 소견으로는 퇴원 가능한 상태이나 어제 갑작스레 열이 나서 내과 진료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열이 났다는 말에 놀라서 무슨 일인지 되물었으나 내과적인 소견은 본인은 알 수 없고 다음 주 토요일까지 별문제가 없으면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서류는 토요일 이전에 미리 간호사실에서 신청하라고 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대한 예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디 이번 면담이 마지막이길.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길.

 

 진료실을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의사는 언뜻 여느 때와 같은 태도로 보였지만 내가 묻는 말에 꼬투리 잡거나 비꼬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우리 쪽으로 대놓고 시선을 두지 않았지만 분명 놀랐을 테다. 오늘 마스크를 쓰길 잘했다고 생각하겠지. 뇌출혈로 쓰러진 아빠를 보러 여자 셋이 번갈아 면회를 오는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부리부리한 눈에 당돌하기만 한 왜소한 막내딸이 거구의 남자들을 데리고 진료실에 들어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남자들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만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무엇보다 키 194센티미터의 피지컬이 주는 위력은 엄청났다. 노력으로 절대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조금 슬퍼지지만, 내가 할 수 없는 일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순순히 감사하기로 했다. 내가 모든 일을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할 수도 없다. 사람은 혼자 살아지지 않으니까.

 

 날이 풀리면서 독감에 의한 면회 규제가 느슨해졌지만, 병실에 한꺼번에 다섯 명이 우르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남녀 나눠서 들어가기로 하고 언니 두 명을 먼저 데리고 들어갔다. 아빠는 잠들어있었다. 어제부터 열이 나서 금식을 한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저번 주에 비해 몰라보게 살이 빠져있다. 손을 주무르며 아빠를 깨웠다. 아빠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처음 보는 여자 둘을 보고 큰 눈을 연신 껌뻑였다.

 

 -とろ、今私がやっているユーチューブのチームの人たちだよ。俳優さんたち。二人とも私よりお姉さん。

 -아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유튜브 팀 사람들이야. 배우님들. 다들 나보다 언니야.

 

 -ユーチューブ?

 -유튜브?

 

 -うん。私ユーチューブチームをやることになったの。1ヶ月くらい経ったんだけど、今日私が運転する車に乗ってみんなで来てくれたの。くるのに三時間以上かかっちゃった。明日休みだからめっちゃ混むね。

 -응. 나 유튜브 팀을 하게 됐어. 한 달 정도 됐는데, 오늘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 같이 와 줬어. 오는데 세 시간 넘게 걸렸어. 내일이 휴일이라 차가 엄청 막히더라.

 

 언니 한 명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화면을 보여줬다. 파파고 어플이었다.

 

 -お父さん、こんにちは!とても美男です。ユミちゃんの目がすごく綺麗なのはお父さん似ですね。

 -아버지 안녕하세요! 너무 미남이세요. 유미가 눈이 예쁜데 아버지를 쏙 닮았네요.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자, 아빠가 천천히 눈으로 글씨를 따라가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울 것 같다는 신호다. 나는 재빨리 서랍을 열어 노트와 펜을 꺼냈다. 언니들 여기에 방명록 좀 적어줄래? 한글로 적어도 괜찮아. 언니들이 적는 동안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다들 엄청 좋은 사람들이야. 유튜브 영상은 이제 곧 올라오는데, 다음 주에 오면 보여줄게. 아빠는 자꾸만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덩달아 눈물이 나려는 걸 참으려고 애써 말을 돌렸다. 아, 재활 병원에 다음 주 토요일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어. 저번 주에 재활병원 얘기했던 거 기억나? 하루에 네 시간씩 재활치료를 할 수 있대. 여기 누워있기만 하면 지루하잖아. 아빠는 아직 건강하니까. 더 움직일 수 있게 될 거야. 병원 옮기는 거 괜찮지?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한 명이 방명록 노트에 나와 아빠를 그려 놓았는데 눈을 특히 크고 반짝이게 그려놓았다. 아빠에게 노트를 보여주고 언니들에게 인사해달라고 했다. 아빠는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뒤이어 남자 둘이 들어왔다. 훈훈한 외모에 덩치 큰 남자 둘이 들어오자 아빠 눈은 아까보다도 더 커졌다. 아빠, 이쪽은 같은 팀 오빠들이야. 이 사람 키 엄청 크지? 194센티미터나 된대. 간단하게 소개하고 오빠들에게도 방명록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키 큰 오빠가 한참을 노트를 붙잡고 있었다. 다 쓰고 나서 두서가 없다며 민망해했다. 꽤 긴 내용이어서 아빠에게 보여주며 일본어로 번역해 읽어주었다. …유미가 밝고 착해요……. 타인이 나에 대해 부모에게 칭찬하는 말이 어색했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려나. 아빠는 결국 얼굴이 벌게져서 울었다. 그 모습에 나도 더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오빠들을 먼저 내보내고 잠시 아빠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아빠. 나 즐겁게 잘 지내고 있어. 다들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다음에 오면 꼭 영상 보여줄게.

 

 맞은편에 새로운 환자가 들어온다고 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을 끌고 왔으니 오래 있기는 힘들 것 같았다. 아빠에게 인사하고 팀원들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아빠는 나만 보면 맨날 운다? 간병인 선생님 말씀이 첫째 딸이나 엄마가 오면 안 우는데 둘째 딸 얘기하면 꼭 운대. 근데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울었어.

 

 -아빠가 유미를 엄-청 사랑하시나 봐.

 

 라고 팀 맏언니가 말했다. 아. 정말 그런가? 나는 아빠의 눈물이 늘 무겁기만 했는데 그게 사랑일까? 혼자서는 미처 하지 못한 생각을 타인의 입을 통해 들으니 새삼스레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병원에서 아빠를 볼 때면 가장 먼저 드는 마음은 측은함이다. 병든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타지에서 고생만 했던 아빠의 삶을 떠올리면 그럴 수밖에. 그러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어려웠던 경제 상황만큼이나 아빠와의 관계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빠는 엄마가 병든 후에도 가정에 헌신하며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에게 요구하는 가장의 역할과 책임에 누구보다 충실했고, 가끔 물건을 부수거나 던졌으며, 못다 이룬 당신의 꿈을 내게 강요했다.

 

 그러다 내가 조금 철이 들 무렵, 그러니까 아빠와의 관계가 채 회복되기 전부터 아빠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국말이 서툰 작은 체구의 일본인은 비록 남성일지라도 이 사회에서 약자라는 사실을 나는 일찍이 깨달았다. 아빠가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나는 아빠가 십 년도 전에 맺은 토지 계약이 기획 부동산 사기였다는 사실과 시골집 텃밭 옆 대추밭 주인이 엄마 아빠에게 휘두르는 횡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다 위병을 앓았다.

 

 아빠는 갖은 고생으로 두 딸을 키워냈고, 두 딸은 각각 출가했고, 서울에서 일하던 아빠는 일흔이 넘어 은퇴하고 청주의 어느 시골집에서 작은 텃밭을 가꾸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후유증인 반신 마비로 몸을 움직이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다, 내 얼굴만 보면 글썽이는 아빠의 눈물이 무거워서 무서웠다. 잔여 시간을 알 수 없는 타이머가 눌린 채로 나는 아빠를 기쁘게 하기 위한 춤을 춰야 할 것만 같았다. 그 눈물에 담긴 다른 의미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건 사랑일 수도 있겠다. 아니 어쩌면, 사랑과 기대와 두려움과 보상 심리와 기타 등등의 그 모든 마음이 공존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 중 어느 마음이 우세한 지 혹은 해괴망측하게 얽혀 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분명 그 안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가끔은 그 커다란 눈망울에 담긴 감정의 깊이에 압도되어 막막하고 먹먹할지라도, 내가 아빠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것처럼 아빠 역시 내게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고. 병원 침대 위에 힘없이 누운 칠십 오세 노인일지라도, 나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가족이 있다고.

 

 그리고 나의 어려움에 망설임 없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왕복 8시간의 거리를 웃으며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오래 머물고 싶다. 아빠가 쓰러지고 난 뒤로, 내가 25년간 그토록 갈망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조금씩 배워간다.

 

 있고 싶은 곳에 있기.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 속에 있기. 좋았던 순간을 확대하고 연장하여 더 오래 머무르기. 이 기분이 풍화되고 휘발되기 전에 글로 남겨두기.

 

 쓰기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잊기와 잊지 않기. 나를 괴롭히는 무언가를 머릿속에서 내보내기 위해 쓰거나,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을 보고 또 보며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쓰거나.

 

 이 글에 가둔 시간을 자주 들여다보고 싶다.

이전 06화 장기전을 준비하는 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