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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Jul 08. 2022

그녀의 교습법


조용하기만 하던 중소도시에 그녀가 이사 왔다. 수더분해 보이는 남편과 함께였고, 시내 중심가에 호루겔 피아노 대리점을 열었다. 

거친 파마머리에 가늘게 찢어진 눈, 화장기 없는 차가운 얼굴이 묘하게 시선을 끄는 모습이었다. 가게를 열자마자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그녀에 대해 별의별 소문이 돌았다. 피아노 천재였다고 했고, 뭔가 불운한 일이 겹쳐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뒤 살림집에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녀는 그 도시의 강력한 피아노 선생님으로 등장했다. 내가 열한 살 때 일이었다.     


호루겔 선생님은 수강생도 아무나 받지 않는다고 했다. 재능을 보고 엄선한다고 했는데, 엄마는 그 이야기를 듣자 조급증을 내기 시작했다. 꽤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내 피아노 실력은 지지부진했다. 사실 나는 피아노에 소질이 없었다. 엄마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거나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인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겨우 호루겔 선생님에게 테스트를 치렀다. 선생님의 첫인상은 듣던 대로 강렬했고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초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고 배운 것을 쳐보라고 말했는데 나는 떨려서 제대로 치지 못했다. 무조건 탈락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피아노 학원에 들어가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날듯 여러 군데 전화를 돌려 뒷구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작은 동네에서 벌어진 일종의 유행병이었다. 학원비도 무지하게 비쌌다. 아빠 월급의 꼭 4분의 1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피아노 교습비를 내며 나는 겨우 선생님의 수하가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가는 레슨은 무서웠고 숙제 양은 어마어마했다. 과연 아이들이 그 많은 숙제를 해갈까 의문이었지만 선생님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고, 주눅이 들만큼 엄하게 굴었다. 레슨을 할 때는 회초리를 들고 손 모양이 흐트러지면 손등을 탁탁 내려쳤다. 제대로 연습이 되지 않았을 때는 호되게 야단을 쳤는데, 모욕적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교습법 중 하나는 경연이었다. 보름에 한 번쯤은 모든 교습생을 모아놓고 경쟁을 시켰다. 자극을 통한 실력 향상이 목적이었을 그 작은 이벤트는 늘 필요 이상 달아올랐다. 그날의 실력에 따라 1등 2등 3등이 엄정하게 선정되었다. 부상으로는 간식박스가 주어졌는데 열어보면 짱구나 새우깡 따위의 스낵이 가득 들어있었다. 나는 한 번도 등수에 들지 못해 엄마를 애 닳게 하다가, 엄마가 피아노 연습 내내 지키고 앉아있기 시작하면서 순위권에 들었다. 부상으로 받은 짱구를 먹으면서 뭔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선생님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이들을 서울로 데려가 대회에 출전시켰다. 무슨 이름난 학원도 아니고 유명 대학교수의 제자들도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꼭 상위권 상장을 들고 금의환향했다. 선생님은 피아노 교습에 관한 한 특별한 사람이었다.     

분명한 목표와 방식은 흔들림이 없었다. 일단 대회가 다가오고, 선수가 정해지면 선생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연습을 했다. 학교만 겨우 갔다 오고 나머지 일과는 모두 선생님이 관리했다. 그렇게 한두 번 대회를 치르고 나서 자신감이 생기자 피아노를 전공으로 정하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그러다 내게도 순서가 찾아왔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대회 경험을 통해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드문 격려와 함께였다. 그러자면 선생님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그리고 때마침 학교 합창단의 반주 제안을 받았다. 나는 죽도록 연습해야 하는 대회 참가보다는 아이들의 합창 반주를 훨씬 하고 싶었다. 그래서 호루겔 선생님에게 의논했더니 반주는 절대로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반주 따위나 하고 싶으면 아예 피아노를 그만두라고 냉혹하게 몰아붙였다.          


그날 이후 나는 부담스러운 대회 참가는 깔끔하게 접었다. 그리고 학교 합창단 반주자가 되었다. 며칠 후 호루겔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면서 처음으로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쌀쌀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선생님은 재미있게 합창 반주를 하라고 따뜻하게 말해 주었다. 모든 사람이 연주자가 될 필요는 없으니 부담 갖지 말라고도 했다.               


선생님이 베토벤처럼 거의 귀가 들리지 않는 난청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본인이 이루지 못한 꿈을 제자를 통해 이루고 싶어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예민한 천재형이었고, 불우한 예술인이었다. 

나는 합창단 반주는 재미 삼아 오래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피아노 치는 법을 완벽하게 잊어버렸다. 이젠 악보도 볼 줄 모르고 건반의 위치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에게 그녀의 교습법은 맞지 않은 것이었다. 차라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나는 아직 피아노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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