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경주>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경주,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공간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 장소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군산”, “두만강” 등등 그는 한 장소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든다. 경주. 80년대생들이 수학여행으로 한번쯤은 가봤을... 아니 수학여행때마다 가봤을 신라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장소. 유시민 작가는 이것이 희생을 강조하는 화랑정신과 경상도의 발전을 위해 과거 정권에서 독려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정재승 박사는 경부선의 존재로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경주에는 그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경주는 “능”을 어디에서든 볼 수 있고, 과거 아이들은 “능”위를 뛰놀며 놀았다. “능”이라고 하면 문화재같고 “무덤”이라고 하면 무언가 꺼림칙하다. 이런 어감의 차이로 경주의 능은 죽음보다는 삶 속에 녹아 있었고, 경주는 죽음과 삶이 오묘하게 첩첩히 접해있는 공간이 되었다. 사실 영화 <경주>를 보지 않았다면 “능”의 교묘한 침투로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전 가본 경주는 과거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방식으로 가꾸어가고 있었다. 죽음보다는 삶의 생기가 넘치는 공간이었다. 솔거미술관의 현대적이고 자연친화적 건축디자인, 익선동이나 이태원 등 보다도 힙하게 느껴졌던 황리단길이 그랬다.
죽음과 과거, 그럼에도 우리는 나아간다
영화에서 최현(박해일)은 죽음을 계속 목도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이다. 동료교수 김창희의 자살, 어렸을때 실수를 했던 여정의 낙태, 모녀의 자살, 자살로 남편을 잃은 공윤희(신민아). 그런데 김창희의 죽음을 맞아 최현은 오히려 세속적임의 끝판왕인 성욕의 대상인 춘화를 찾아 경주로 간다. 그러나 경주는 더욱 죽음과 가까운 도시이다. 그럼에도 그를 현실과 이어주는 것은 담배인 것 같다. 중국에 사는 중국인 아내의 표상인 담배의 냄새를 맡으며 계속 현실과의 접합점을 유지해간다. 그러나 성욕의 대상을 여정, 관광안내원에서 공윤희로 옮기고 경주에 점점 녹아들어간다.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그가 계속 정진해왔던 동북아 정치나 김정은의 집권은 “똥”에 불과하다.
살짝 문을 열어놓는 공윤희의 필살 유혹을 입으로 촛불끄기(촛불이 꺼지는 것도 죽음처럼 느껴진다)로 물리치고 그의 삶은 춘화에서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라는 글귀의 그림처럼 넘어간다. 그리고 다시 삶과의 접합점인 아내의 음성메시지를 통해 최현은 다시 삶에 돌아온다. 사실 영화에서 경주 특히, 찻집 아리솔은 너무 아름답고 또 특히, 잎사귀의 푸르름은 너무나 생명의 파릇파릇함같다. 그러나 장률 감독은 삶에 돌아온 최현을 그냥두지 않는다. 여정에게 점을 봐 주었던 할아버지가 죽은지 꽤 된 할아버지(망자?)였다는 사실, 갑작스럽게 목도하는 죽음, 물이 없는 돌다리에서 들리는 물의 환청 등 갑자기 장률 감독은 다시 죽음을 극에 등장시키며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호접몽”이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관객들은 여기가 삶인지 죽음인지 혼돈에 빠진다.
마지막 장면은 뭘까?
화룡점정은 마지막 장면. 춘화를 보는 과거 장면에 갑자기 공윤회가 재등장하고, 김창희 교수와 최현의 동성애 코드까지 등장시킨다. 해석은 해석을 낳지만 이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은 본적이 없다. 마지막 장면은 무슨 의미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며 감독의 실제 경험이다. 죽음과 가까운 공간에서 춘화를 보는 아이러니한 경험이 장률 감독에겐 퍽 인상적이었나보다. 최현의 타임루프라니 망자가 되었다니 이런 SF급의 장르변경 해석보다는 공윤희는 당시 종업원이었고, 최현은 춘화에 대해 농을 하던 사람들이 급 조용해지는 모습을 보고 웃었으며, “한잔하고, 하세”처럼 죽음보다 삶을 그것도 강렬함보다는 여유로운 삶을 택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해석에 기대어 보고 싶다. 장률 감독의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비슷한 리듬, 비슷한 인물로 구성되지만 이런 특이한 시각에서 다른가 싶다.
- 2018년 12월 26일 작성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