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한 지 3년이 되었을 무렵까지 연차나 휴가를 써본 적이 없었다. 1년에 7일을 사용할 수 있는 휴가제도가 있었는데, 그것을 사용할 '마음적 + 시간적 여유'가 여태껏 없었다는 게 나의 변명이다. '여행을 가고 싶다.'라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언젠가는 해외에서 더 폭넓은 경험을 할 것이라는 열망은 가득했다.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사회초년생'의 '사회생활 기초 다지기'시간을 3년 정도 보냈다.
그러던 나는 2017년에 첫 휴가를 사용하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만의 첫 해외 출장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야? 얼마나 크게 성공하고 싶길래?"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다.
당시에는 '워커홀릭' 혹은 '로봇'이라는 수식어가 내 이름 앞에 많이 붙어있던 터라 익숙한 반응이었다. (물론, 입사 전까지 이러한 이미지로 살아온 적이 전혀 없었기에 날 예전부터 알던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이미지가 무섭다.)
사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내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사람들의 그러한 반응은 깊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타인이 이야기하는 성공은 뭘까? 성공의 정의는 저마다 다를 텐데. 통상적인 의미(사회적으로 명예나 부를 얻는 것 = 성공)로 적용해 보자면, 난 거창한 꿈을 가지고 있진 않은걸? 부유한 사업가가 되고 싶은 것도 전혀 아니고. 하지만 소소한 것에 만족감을 느끼지 않는 타입인 건 맞아. 성취감을 꽤나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난 어떠한 유형의 사람인 걸까? 그리고 뭘 위해서 난 달려가고 싶은 걸까.'
결국 이것이 나의 답변이었다.
"그냥 직접 알고 싶어서요."
그렇다. 나만의 해외 첫 출장을 만들고자 했던 계기는 분명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미지의 영역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누군가 나에게 만들어줄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지언정 직접 경험하지 않고 안주하는 안일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에게 그 미지의 영역은 '생두와 무역' 영역이었다. '생두 수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연륜 있는 사람, 즉 해외의 그린빈 바이어를 직접 만나고 싶었고, 생각을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이 부분은 당시에 회사 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개인적인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럼 어떤 사수를 만날 텐가?
실력 없는 학생일지라도 나를 잘 가르쳐줄 실력 있는 선생님은 알아보는 법이다. 특정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선망을 받는 대상으로 이어지는 건 쉽지 않다. 또 사람마다 그 기준 또한 다를 것이다.
아래 요소들을 갖춘 사람이 적어도 나에게는 직업인으로서의 '롤-모델'이었다.
1. 다양한 경험을 통해 편파적이지 않은 열린 사고를 갖춘
2. 주인공이 되는 것에 심취해 있지 않은 (=우월 의식이 없는)
3. 언어에서 뿐만 아니라 비언어적인 모습에서 프로의식이 드러나는
4. 통제력과 안정감을 갖춘
5. 무엇보다도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데 주저함이 없는
2016년 11월, 매년 열리는 카페쇼에서 회사 부스에 찾아온 영국의 그린빈 바이어인 G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지만 눈빛과 표정에서 드러나는 모습에서 나는 G가 적임자임을 직감했다. 당시에는 그저 'Trust your gut'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나의 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구글링으로 G를 공부해 보았다. 런던 기반의 생두 회사에서의 이력과 COE*의 운영 매니저로서의 이력, 그리고 한국과 비교적 가까운 싱가포르에 지사가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무작정 G에게 '휴가로 싱가포르로 여행을 가는데 가능하다면 만날 수 있는지' 연락을 해 보았다. 답장이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정말 감사하게도 G는 싱가포르 지사로 초대를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아시아 소녀의 호기로운 연락 정도쯤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COE(Cup Of Excellence): 20여 년 전에 설립된 커피 경매 시스템. 쉽게 말해 커피가 대회에 출전하여 대결을 하는 것이다. 남미와 중미에서 주로 진행되고 있으며 2020년부터 에티오피아에서도 COE가 개최된다. 매년 국가마다 300여 개의 농장이 자신들의 원두를 COE에 출품하고, 그중 40여 개 농장만이 선별되어 국제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받게 된다. 이중 87점 이상의 상위 30개 커피를 대상으로 경매가 이루어진다.
싱가포르 지사에서 나를 초대하며 만든 커핑* 자리에는 싱가포르의 많은 커피 로스터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커핑을 하고 그린빈 바이어 및 세일즈인 G, 그리고 무역 담당자인 A와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싱가포르의 과일을 신기해하는 나를 위해 함께 시장에 가서 과일 테이스팅을 하기도 했으며, 저녁에는 근사한 로컬 음식도 대접해 주었다. 또 나의 호기심 어린 질문들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내가 당시 관련 업무를 행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준 애티튜드는 나의 차후 직업적 가치관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커핑: 커피 산지 혹은 관련 업체에서 커피의 품질을 측정기 위해 커피의 향미를 평가하는 작업
호기롭게 기획한 나의 자급자족 귀여운 첫 해외 출장은 막대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다. G는 앞으로의 나의 프로젝트들과 성과에 지대한 영향을 선사해 준 훌륭한 프로젝트 파트너이자 귀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