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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득원 Nov 10. 2024

<웰다잉 프로젝트>: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대한 고찰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본격 장르만화 단편집이 보여 주는 세상에 대해

그림1. 『웰다잉 프로젝트』 Ⓒ봉봉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도 다양한 견해와 의견이 생긴다. 이에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당사자들의 의미는 여러 해석과 차이를 획득한다. 『웰다잉 프로젝트』는 극단의 견해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생긴 ‘의미’들을 독특한 SF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단편집이다. 총 6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순서와 상관없이 단편을 2개씩 묶어 각각 ‘의미’의 능동성, 수동성, 그리고 오해에 대해 먼저 다뤄 보고자 한다. 이후 의미의 탄생 과정을 되짚으며 독자로써 작가에게 건넬 수 있는 최선의 응답을 찾을 것이다.



<웰다잉 프로젝트>, <붉은 여왕>: 능동성


종종 인생의 최후를 상상하지만, 그 최후는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며 당장 해야 하는 일도 너무 많다. 내일이 급하니 먼 미래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내몰리다가 언젠가 체념이 찾아온다. 체념이 찾아왔을 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나아가거나 사라지거나, 두 가지뿐이다.


<붉은 여왕>은 유전자 조작으로 모두가 아름다워진 세상에 돌연변이로 태어난 사람이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에 반해 <웰다잉 프로젝트>는 사라짐을 택하는 과정을 담았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이 원하는 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현해서 최후를 장식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행보가 다른 결말을 주는 건 아닌 걸로 보인다. 이들의 체념은 외부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의미를 스스로 부여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남들의 해석에 갇혀 버렸으므로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조차 없었다.


의미 부여의 시작이 스스로인 건 분명한데, 의미를 키우는 건 타인이라니 우습고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도 너무나 자주 겪게 되는 아이러니이다. 의도와 전혀 다르게 읽힌 행동으로 울고 웃게 되고, 마음먹었던 일들에 변수는 한도 끝도 없다. 한 번 시작된 변화는 연쇄 작용을 일으켜 일종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정신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온통 폐허임을 깨닫게 되는 시간은 얼마나 빈번한가. <붉은 여왕> 속, 모두가 아름다워진 세상에 살고 있던 돌연변이 주인공은 실전된 ‘성형 수술’을 도입한다. 남들과 살짝 다른 외모는 곧 미인이라는 개념의 재발굴로 이어진다. 우후죽순 늘어나는 외모 교정 수술 병원, 평범함의 기준은 완전히 뒤바뀐다.


그림2. 『웰다잉 프로젝트』, <붉은 여왕> Ⓒ봉봉


“지난 수십 년 동안 난 계속 원래 얼굴보다 아름다워졌는데…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 평범해질 수가 없어, 루이스.”

“이제 알았구나.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꿔버렸는지……”(<붉은 여왕>, 121p.)


의미를 잃는다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음을 알기에, 스스로의 기준과 태도를 조정하여 다시 당장 해야 하는 일부터 해치우기 시작하면서 지내고 있다. 우리들의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돌아보면 폐허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고, 발을 멈추지 않고 달리면서 말이다.



<ANA>, <마지막 비행>: 수동성


<ANA>는 인공자궁이 통용되는 미래를 가정하고, 기술의 시작과 끝을 다룬 페이크 다큐 형식의 작품이었다. 특정 기술의 출현은 언제나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기술뿐이 아니라 모든 사건이 그런 운명을 타고 난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은 비난의 계기가 되고,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외부의 비난은 비수로 탈바꿈되기에 논란은 논쟁을 낳는다. 30년 동안 이어진 인공자궁에 대한 논쟁 속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과정이란 지금껏 봐왔던 모든 논쟁을 연상시켰다. 논쟁은 <마지막 비행>에서도 이어진다. 생명과 윤리에 대해, 또 빈부 및 신분 격차라는 굵직한 주제를 고민하도록 하는 <ANA>에 비해 <마지막 비행>은 다소 가볍고 유쾌하다. 유명해지고 싶어 버스를 하이재킹 하고 이를 개인 방송으로 송출하는 3명의 서사를 풀어낸 이 작품은 사람들의 착각으로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 그저 행동으로 옮겼을 뿐인데, 그 파장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했다. 의미를 붙이는 건 스스로도 할 수 있지만 이를 인정하고 소비하는 건 타인이다. 의미는 타인의 해석과 반응으로 인해, 즉 수동성에 의해 무거워지는 것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질뿐 인데, 일(日)이라는 개념을 붙이고 월(月), 연(年)으로 묶어서 시간에 의미를 부여했다. 태어난 날, 연애를 처음 시작했던 날, 결혼한 날, 세상을 떠난 날 등 각자에게만 각별한 ‘날짜’도 있다. 사람은 각자의 탄생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의미란 망상으로 전락한다.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의미란 얼핏 근사해 보이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 된다. 기준이 되고 구분이 생기므로 영역의 밖과 안이 정해진다.


네 편과 내 편으로 양분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하고 심화된다. <ANA>와 <마지막 비행> 속 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건 본인이 정한 의미 이상으로 무거운 ‘의미’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의미의 무게에 짓눌려 본인을 잃어버리는 것과 의미의 가치를 재단하기 위해 본인을 버리는 것, 혹은 그 어떤 의미도 남기지 못하는 것 등 대립의 끝은 극단으로 향한다. 그 과정에 필연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오해’ 일 것이다.



그림3. 『웰다잉 프로젝트』, <신은 변기> Ⓒ봉봉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 <신은 변기>: 오해


쥐가 손톱을 먹으면 손톱의 주인과 닮은 사람이 된다는 설화가 있다.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의 주인공은 집에서 키우던 햄스터에게 손톱을 먹’였’고, 햄스터는 자신이자 타인인 도플갱어가 된다. 여러 매체에서 도플갱어의 만남은 비극으로 묘사되지만 주인공은 도플갱어를 경계하지 않는다. 도플갱어도 주인공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노력하는 마음, 그 마음과는 무관한 결과들에 힘들어하면서도 첫 만남에서 가졌던 각자의 의미를 잃지 않는다. 주인공에게 도플갱어는 자신과 똑 닮은 안타까운 타인이었고, 도플갱어에게 주인공은 자신을 만들었지만 안타까운 타인이었다.


타인을 향한 연민은 의미를 지켜 주는 든든한 감정이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에 앞서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도록 종용하고 응원하도록 하여 존중을 이끌어 낸다. 오해조차도 연민 앞에선 하나의 해프닝이다. 보기만 해도 안타까움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털어놓게 되는 건 본인의 아픔이기에, 아픔의 공유는 연민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아픔이 단지 아픔으로 마무리되는 건 연민을 잃었을 때다. <신은 변기>란 말 그대로 신이 변기라고 믿는 종교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은 연락이 끊긴 부모님을 찾으러 신을 변기로 모시는 종교집단에 잠입한다. 무엇이든 집어삼키고 흘려보낼 수 있는 변기를 가지고 완벽한 범죄를 행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그저 본인들만 연민하는 이들을 보며 환멸을 느낀다. 연민이 부재한 의미는 편리하게 활용된다. 타인이 안중에 없다는 건 신경 쓸 게 없다는 뜻이다. 그저 각자의 본능을 따르면 되는데, 오해랄 게 뭐가 있겠는가.



의미의 탄생


일본의 사회철학자 이마무라 히토시는 ‘불을 피우는 행위’는 의미를 구조화하는 ‘의례적 실천’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의미 부여의 기원을 원시 인류의 불을 피우는 행위에서 찾는다. 수렵 채취 사회의 원시 인류는 불을 피우는 행위를 통해 공동체를 유지했다는 접근이다. 불을 피우고, 둘러앉는다. 여기서 선행되는 건 불을 피우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이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여된 의미를 의식하면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림4. Adam Elsheimer, <이집트로의 피신>, 1609.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대상과의 관계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며 존재의 목적을 정당화한다. 무기력이나 우울함은 그 목적이 정당화되지 않을 때 생긴다. (이마무라 히토시, 『의례의 온톨로기-인간사회를 재생산하는 것』, 2007.)


의미보다 의지, 그리고 실천이 먼저다. 목적은 선택할 수 있다. 자거나 쉬기 위해(의지) 눕는다는 행위(실천)는 목적이 된다. 잠을 잔다면 혹은 피곤이 가신다면, 어떤 성과를 얻는다면 휴식이라는 의미가 생긴다. 의지와 실천 앞에 의미를 두면 어긋난다.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로 대두되는 건 ‘짐작하는 것’이다. 일을 하기 전, 이런 성과를 통해 저런 이윤을 창출해야지, 혹시 어떤 문제들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생각만 앞서는 수많은 실패담은 이를 반증한다.



의지+실천=성과: 수많은 의미(해석)=무의미(불필요한 해석)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본격 장르만화 단편집’이라는 캐치프라이즈는 무척 매력적이며, 기술이 뒷받침되는 가정 하 펼쳐지는 판타지는 묘한 현실감을 가지도록 한다. 여기에 더해 생활처럼 우스꽝스러운 날 것의 유머는 이야기를 더 가깝게 느끼게 만드는 작용을 했다. 그러나 이 단편집은 통렬한 사회 풍자 이상으로, 의미가 탄생하는 과정, 더불어 중첩된 의미들로 인한 무상함(무의미)까지 탐구하고 고찰하도록 한다.


“저 멀리서 볼 때 나의 탄생은 우연적이었고, 나의 삶에는 아무 이유가 없으며, 나의 죽음은 지극히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나의 내면의 관점에서 내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하고, 나의 삶은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나의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파국적인 사건 다름 아니다.” (Nagel, T., The Vies from Nowhere(영원의 관점),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결국 단편집에 대한 감상이란 “세상사 요 지경”이었다. 온전하게 수동적일 수도, 완전하게 능동적일 수도 없는 의미의 생성과 확장은 오해를 낳고 지우길 반복하니, 단편집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을 현실과 분리할 수 없으니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어느 시간에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모두 자연스레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의미는 붙이는 게 아니라 생기는 것이다. 붙는 것이다. 커지는 것이다. 행위 이후 자리 잡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능동성과 수동성의 경계를 희미하게 하며 나아가 의미와 무의미의 혼동으로 부조리함으로 이어진다.

그림5. 작가 미상, <육도윤회도(六道輪廻圖)>, 티베트 탱화



동고(同苦, Mirleid)라는 응답


다만 『웰다잉 프로젝트』를 통해서는 이 의미와 무의미를 넘어 모두가 각자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연민, 즉 쇼펜하우어의 동고(同苦, Mirleid)에 대해 말하고 싶다. 동고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심정이다. 모든 존재가 의지의 지배를 받기에 고통스럽다는 것을 인식하며 자신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구분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마음이다. 자신과 타인을 다른 개체로 보기에 발생하는 의미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탄생이, 그렇게 쌓이는 오해는 반목과 대립이 횡횡하는 지금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사회를 만든 게 아닐까. 의도와 관계없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답 없는 삶에서 연대감을 가지고 지내게 되는 태도는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일 것이다.


“그 자신의 본성과 수많은 쓰라린 투쟁을 거친 뒤 결국 완전히 극복하는 인간은 순순하게 인식하는 존재로서만, 세계를 맑게 비추는 거울로서만 남아 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에도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고 계속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하면서 욕망, 두려움, 질투, 분노로서 이리저리 휩쓸리게 하는 의욕의 온갖 수천 가지 실마리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Arthur Schopenhauer,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818.)


그리하여 “순수하게 인식하는 존재로서만, 세계를 맑게 비추는 거울로서만” 남아 “조용하고 자신 있는 명랑함”을 겸비한 삶이야말로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본격 장르만화 단편집인 『웰다잉 프로젝트』에 대한 최선의 응답이 되지 않을까.



참고 자료

최성호,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부조리의 철학: 카뮈와 네이글에 대한 독법」, 《철학적 분석》 41, 2019.

박은미,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EBS BOOKS, 2021.

김정운, [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意味'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조선일보, 2015.



* 본 글은 만화규장각 > 웹진 > 칼럼에 수록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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