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태그 방청 후기
진실은 ‘사실’이라는 수십수백 개의 선들이 교차하는 그 중앙에 위치하는 어떤 것이다. 이 수많은 선들을 모두 섭렵해 진실을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핵심적인 내용들을 추려 전달하는 것이 바로 언론의 역할이고 이 추리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것이 프레임이다. 그 틀을 위해 어떤 가치가 적용될 것인가 라고 하면 거기에 사용되는 가치는 언론사들의 수익을 비롯한 제반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도 있지만 보통은 사회에 통용되는 집합의식에 기반한다.
언론의 문제를 지적할 때 서술의 기술적이나 내용적인 부실함, 서술에 깔려있는 간악한 의도나 시선을 꼽는 경우도 있지만 프레임을 어떻게 잡느냐와 같은 현상을 가공할 때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집합의식에 까지 소급 적용된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집합의식의 실체는 무엇일까? 정의? 공정? 행복? 이 용어들과 그 밖의 많은 허울 좋은 표현들이 우리 사회의 혹은 개인들의 아주 소중한 가치로 유통되지만 결국 한국 사회의 집합의식의 총체는 돈이다. 나머지 언급되는 가치들은 이 속물적이어서 내놓기 부끄러운 가치를 숨기기 위한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다시 언론의 이야기로 돌아가 이 집합의식에 기반한 프레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최근에 나오는 대안, 그리고 그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제안은 깨어있는 개인의 노력이다. 과연 개인은 깰 수 있을까? 아니 깨어있는 개인이란 무엇이며 현재 대중의 절대다수는 과연 깨어있지 않은 것인가?
누군가를 지적, 의식적으로 깨어나게 하는 것을 계몽이라고 한다. 그리고 과거 대부분 국가의 역사 속에 계몽주의 시대들이 있었다. 이 계몽주의를 거치며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기반한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역으로 현대 사회의 중요 시스템이자 가치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계몽주의의 산물인가에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는가? 많은 이들이 이 질문에 일견 그렇다고 하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류의 역사에서 진보해 온 것은 과학 기술이지 역사적이나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진보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기타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의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반면 각 사회, 각 개인의 지적 수준이나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라는 것은 이 최근 20여 년 사이에 급증했으며 때문에 조건적인 측면에서 인류는 수백 수천번의 계몽을 이뤘어야 할 상황에 있다.
계몽이 역사의 진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의식의 진보를 가져오지도 않고 집합의식의 개선이나 사회의 정의로움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뿐이다.
최근의 언론이 말도 안 되는 프레임 속에서 정보를 양산하고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상당한 영역에서 용인하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깨어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그들의 욕망에 부합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형성된 시스템에서 - 그에 대한 자신의 가치판단의 향방과는 상관없이 -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속에서 나는 깨어있다, 깨시민 류의 용어 자체가 오만함의 표상이고 어불성설이다. 그 자체가 자신의 오류를 가리는 행위이고 그 자신이 그 지점에서 다시금 헤게모니를 주도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누구도 깨어있지 않고 그 누구도 깨어있을 수 없다. 아무것도 진실이 아니다. 다만 진실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진실을 인지하게 된다거나 언론이 정상화가 된다거나 사회가 정의로워질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그러면 그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평생 배우고 또 배워야 합니다.
이력을 쌓거나 출세하여 장관이 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계속 배워야 할까요?
그것이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 마스터 키튼 중
그렇게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고 멍청함을 납득하고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러한 멍청이들 중 한 명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의 사명이고 ‘깨어있는’ 자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과업이기 때문이다.
절제하고 인내하는 인간은 경악할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멍청함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 안토니오 그람시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의지가 낙관주의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나의 자존심이 의지를 만들고 그것이 더 나은 나를 위해 타협하지 않게 하고 그를 통한 귀찮은 활동이 나에게 만족을 주고 다시 나의 자존감을 높인다. 그것을 위해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행위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기억하고 평가하고 판단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