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덕분에 00 하나는 내가 자신 있었어. 고마워 엄마.”
미래에 내 아이들에게 듣고 싶은 말이다.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재능, 성향, 경험. 그게 무엇이든지 선물로 주고 싶다. 둘, 셋도 좋지만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 ‘00’이 무엇이면 좋을지 고민하다 보면 과거의 나를 자꾸 들춰보게 된다. 가장 가까운 예시를 통해 복습과도 같은 예습을 하는 것 같다.
수많은 직업과 직종을 ‘회사원’으로 치부하며, ‘회사원, 그것만큼 불안정한 것도 없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라.’, ‘공무원이 최고다.’ 하시던 우리 엄마.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이 왜 이것뿐일까 생각하며 엄마를 부단히 원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 물정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는 그런 엄마의 영향으로 법대에 입학했다.
전공 공부가 이리도 어려운 것이었던가. 드라마 속에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 검사를 동경하며 사법고시를 꿈꿔본 적은 있지만, 정작 4년 동안 전공 서적을 붙잡고 낑낑거리게 될 모습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렇게 1학년부터 방황하는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졸업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 국제법을 수강하며 오랜만에 열정을 느꼈다. 셀 수 없이 쏟아지는 학설·판례에 지쳐있다가, 국제법을 공부하고 있으면 세계사를 배우는 것 같고, 세계를 여행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내 세상은 한국밖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 많이 다가가 봐야겠다. 우선 영어를 배워보자. 영어를 공부하다 보면 뭔가 보일 수도 있어.’
영어를 참 좋아했던 학생이었다. 수능 나부랭이(?)가 우리를 갈라놓았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영어 스터디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어렵지 않게 동지들을 만나 공부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 외우던 단어들을 오랜만에 입 밖으로 내뱉어 보니 신이 났다. 듣고 말하고 외우고 쓰고, 듣고 말하고 외우고 읽고. 미드를 수없이 돌려보며 캐리(드라마 <Sex and the city>의 주인공)와 레이철(시트콤 <Friends>의 주인공)의 삶에 열광하기도 했다.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가야겠다. 어학연수.’
좋아하는 것을 잘할 수 있다는 것. 이 매력적인 희망이 사법시험과 취업의 굴레를 벗어나 흐릿하지만 분명해 보이는 새 길로 가보라고 속삭였다. 영어만 보고 영어만 공부하고 영어로 돈도 벌었다. 5개월 만에 자그마치 천오백만 원. 어학연수에 필요한 자금이었다.
‘이 정도면 6개월 정도는 다녀올 수 있겠다. 충분해.’
행복했다. 미래의 내 모습을 꿈꾸는 것.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갈지 고민하고, 집을 구하고, 항공권을 사고. 두려움은 없었다. 더 많이 보고, 듣고, 배워서 오겠다는 욕심뿐이었다. 영어는 그렇게 기회이자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내 인생을 기막히게 비틀어놓은, 새로운 여정의 도화선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사법고시도 싫고, 취직도 흥미 없던 부적응자가 도망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낸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을 잘할 수 있다’라는 희망이 정말 달콤했다. 강력한 동기가 삶의 방향을 얼마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도 경험했다. 게다가 영어는 과거의 나보다 더 많이 보고 듣게 해주고, 그로 인해서 더 많은 것을 고민하고 꿈꿀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다. 평생 간직하며 필요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강력한 내면의 힘.
그러고 보니, 엄마도 나에게 무엇인가를 남겨주고 싶었을까. 엄마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뒤늦게 딸에게 닿았던 건지, 먼 길을 돌아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빨리 노출해 주기로 했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걸어보라는 의도는 아니다. 엄마에게 좋았던 것을 물려주고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들만의 방법으로 달콤쌉쌀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나’처럼 영어를 사랑하지 말고, ‘너’만의 방법으로 사랑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