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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나무 Dec 08. 2022

9. 죽음에 대하여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98세의 나이셨다. 돌아가시기 전 3년은 요양병원에 계셨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시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집 근처로 모시지 못하고, 고향 저 먼 곳에 모셔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코로나 시국으로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다 급성 신부전증으로 단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


장례식 분위기는 차분했다. 염할 때나 화장하기 전, 고모님과 그의 손자인 내 남편이 약간의 눈시울을 붉히는 정도였다. 오래 앓지 않고 돌아가셔서 자식 고생 안 시키셨다고 시어머니는 감사해하기도 하였다. 시할머니의 장례가 호상이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호상. 호상이라는 말에 담긴 죽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한 늬앙스가 까끌한 모래를 씹는 듯 불편하게 다가왔다.


시할머니의 죽음으로 내가 죽음에 깊게 빠져있던 때가 떠오른다. 나는 내유림프절 전이가 발견되어 기수가 많이 올라간 케이스다.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가 내유림프절 전이가 불과 30년 전에만 해도 4기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치료가 어려운 부분인 줄은 알았지만 4기라니. 물론 지금의 분류 기준은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내유림프절 전이도 3기로 분류되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죽음이라는 것이 내 눈앞에 다가온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때의 감정과 정신 상태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감정의 깊이이다. 흔히, 죽고 싶다. 그만 살고 싶다. 내뱉는 그런 말이 아닌. 진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로서의 죽음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나는 죽음의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 나는 이미 내 아버지가 내가 중 3 때 돌아가신 경험이 있다. 남은 자들은 그때는 힘들어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삶을 굳건하게 잘 살아나감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남은 나의 가족들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특히 나의 딸은 그동안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을 듬뿍 주며 키웠고, 주변에 나를 대신하여 내 딸을 사랑해 줄 사람들이 많았기에 내가 없더라도 잘 클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죽으면 그뿐이다. 삶의 모든 숙제를 내려두고 평안에 들어갈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가 참지 못 할 정도의 극심한 고통과

신체와 정신에 대한 자기결정능력이 사라지는 것,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장수는 과연 축복인 걸까? 돌아가기 전 3년을 치매로 요양원에 계셨던 시할머니의 삶을 생각해 본다. 사랑하는 아들, 딸을 1년에 두세 번 보는 삶. 작은 요양원에서 지내는 삶. 기억이 하루가 다르게 흐려지고, 어제 내가 무엇을 했는지도 가물가물해지는 삶. 할머니는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셨을까. 나는 신체적, 정신적 자기결정권이 온전한 건강한 장수만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블로그를 즐겨 하기에 여기저기 환우들의 블로그를 이웃으로 두었다. 그러다 그들의 재발이나 전이 소식이 들린다. 그들은 절망을 하다, 다시 이겨내고 치료를 받는다. 그러다 블로그에 소식이 뜸해진다.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지고, 불안해질 때쯤 부고 소식이 올라온다. 20대의 언진 양이 그랬고, 건오엄마 윤지회 작가님이 그랬다. 그들의 죽음을 알게 되면 난 일주일쯤은 혼자 가슴 앓이를 했다.  마음속으로 깊이 추모했다.


최근에 4기인 한 환우가 너무 고통스러워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싶지만, 남은 가족들을 위해 그럴 수 없다고 남기신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음식을 먹은 본지가 반년이 지났다는 그녀. 콧줄로 영양을 공급 받으며 버티고 있는 그녀도 이제는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


남은 가족들을 위해 버티는 삶. 의료법에 의해 연명되는 삶. 이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삶일까?


나는 죽는 그날까지 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가지기를 바란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지켜지기를 바란다.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 그때의 공포에서 벗어난 나에게 묻는다. 자기 결정권을 가진 삶을 살고 있는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있는가? 나는  주변 사람들의 자기결정권과 존엄성을 존중해주고 있는가?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위의 질문에 대답하고 의문을 가질 의무를 가지고 있다. 지금 죽어가는, 아니 버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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