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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하 Jan 07. 2024

B의 도전을 응원해

사는 게 지쳐서 독일 여행을 떠났다.

2018년 가을 베를린 교환학기를 하면서 튀르키예 친구를 알게 되었다. 이 친구는 한국 친구 윤의 플랫 메이트였고, 한국인 교환학생인 우리는 그의 플랫에서 자주 놀면서 B와 친하게 지냈다. 교환학기가 끝나고 우리는 매서운 현실이 도사리고 있는 각자의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고, 혹독한 바람에 맞서 각자의 도시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삐 전진했다.


이번에 베를린 여행을 계획하면서 옛 친구들에게 안부를 건넸다. 지나 5년 동안 너는 어떻게 달라졌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단다는 것을 얘기하고 베를린으로 여행 간다는 얘기를 건네기 위해서. 연락을 돌린 많은 친구들 중 B는 유일하게 독일인이 아닌 외지인인데 베를린에 남아있던 친구였다. 그는 튀르키예 어느 대학교의 석사 졸업 준비생이며, 독일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 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이참에 베를린에서 만나기로 했다.


베를린에는 Kreuzberg라는 예술가들의 동네가 있다. 동네를 걸어다니면 건물 벽마다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고, 예술가들이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는 깃발들이 건물에 걸려 있기도 하다. 그래서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비긴 어게인 시즌 3에서 태연이 크로이츠베르크 한복판에서 노래했던 영상이 있는데 그후에 많은 한국인들이 크로이츠베르크를 힙한 동네로 알고 있다. 



예술가들의 동네라고만 생각하면 그 동네가 가진 무궁무진한 스토리들을 하나로만 제한하는 셈이다. 예술가들의 동네이기도 하지만, 크로이츠베르크의 한복판은 튀르키예 식당과 카페로 가득하다. Kotti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Kottbussor Tor 역사 주변은 튀르키예 이주민들이 오래 전부터 뿌리 내려온 삶의 터전이다.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1961년 독일은 전쟁 이후 인력이 부족하여 각국으로부터 인력을 차출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튀르키예 사람들은 베를린에 장벽을 건설하는 명목으로 이주 오게 되었다. 섬유 및 전자 산업에 몸담고 있던 튀르키예의 전문 인력들이 베를린으로 이주하면서 크로이츠베르크에 정착하였다. 그러면서 60년대 후반이 되면서 점차 튀르키예 언어와 독일어를 모두 구사하는 어린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에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튀르키예의 문화는 베를린 거리에 스며들게 되었으며, “낮은 독일, 밤은 튀르키예"라는 설명이 대표하는 동네가 되었다.


그곳에서 B는 베를린의 튀르키예 한복판에서 튀르키에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고, 그는 튀르키예 전통 음식 체험을 맛보여준다고 하면서 나를 튀르키예 가정식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Mercan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B가 낯선 도시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지를 들었다.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니 여러 고난을 겪은 게 느껴져 안쓰러웠지만, 본인이 선택한 길에 자긍심을 가지고 묵묵히 일상을 버텨내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독일어를 모르는 그가 여기서 일을 구할 수 있는 곳은 튀르키예 음식과 문화가 즐비한 Kottbussor Tor 주변이었고, 지금 일하고 있는 이 카페에서 파트타이머로 1년 반 동안 일을 했다. 정을 붙이고 살만한 좋은 공간을 찾았으나, 같이 사는 플랫메이트들과 트러블이 있어서 새롭게 살 곳을 찾으면서 sublet (월월세)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동시에 석사 졸업을 위해 논문 제출을 준비하느라 낮에는 학생으로 공부하고 밤에는 파트타이머로 일을 했다. 


자국보다는 풍족한 삶을 영위하겠다는 목적 하나로 버텼다고 한다. 최근에는 에르도안의 긴 독재생활을 끝낼 수 있던 선거가 있던 해였는데, 치열한 공방 끝에 에르도안이 독재를 더 영위하게 되었다고 한다. 간소한 차이로 독재를 막을 수 없었던 올해 많은 젊은이들이 튀르키예를 떠났고 B도 그중 하나였다. 10살 차이 나는 동생은 곧 대학에 들어가는데,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게 도와주어 본인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게 해줄거라며 다짐했다.


Mercan에서 전형적인 튀르키예 가정식을 먹었다. 유럽의 음식과 비슷한듯 묘하게 달랐다. 토마토 베이스 페이스트와 가지를 활용해서 반찬과 같은 개념의 음식이었고, 밥 또는 쿠스쿠스를 섞어서 먹는 튀르키예식 볶음밥이었다. Karniyarik이라고 불리는 가지 음식은 토마토 수프에 푹 절여져 있다. 다진 고기가 충분히 올라간 잘 익힌 가지 한 토막을 잘라서 푹 삶은 토마토 수프에 적셔서 먹으면 뜨뜻한 수프에 부드러운 가지가 기분 좋게 뱃속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식전엔 차치키라는 요거트에 오이를 찍어먹고, 식후로는 튀르키예 방식의 블랙 티를 마시며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난 5년에 대해 얘기를 했다.


“도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의미가 되어간다. 20대 초반에 내가 생각한 도전은 모르는 세계로 내딛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발을 내딛은 후 버티는 것이 도전하는 사람의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20대엔 맨땅에 헤딩이 도전의 정수라고 생각했으며, 여러 활동을 오랜 시간 지속하는 것보다, 경험의 갯수를 늘렸다. 하지만 30을 앞두고 있는 오늘, 도전을 다른 의미로 정의해본다. 한 번 내딛은 후, 여러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에 영향받지 않고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도전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 같다.


밤의 거센 파도처럼 변화무쌍한 시간과 감정은 우리를 덮치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파도를 경험한 것에 고취되어 휘몰아치는 감정 때문에 파도에 맞서 싸우지 않고 후퇴해도 파도를 경험했다는 것 자체에 감격을 했다. 시간과 경험이 쌓인 지금, 여러번의 파도를 관찰하는 것보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끄떡않고 버티는 사람이 도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나가고 있다. 지난 5년 간 B가 고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모습은 바다 한가운데 등대를 향해 나아가는 노젓는 사람과 중첩되어 보였다. 


B를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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