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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토 May 30. 2022

어느 발레리나의 아방튀르

외제니 비르지니 오레이유 (1795-1875)


1820년 9월 29일, 사람들은 기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8세의 조카며느리인 베리 공작부인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duchesse de Berry]의 출산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이미 슬하에 딸 한 명을 두고 있는 베리 공작 부부는 자녀가 없는 루이 18세를 대신하여 왕가를 계승해 줄 것이란 기대를 받았었다. 그런데 7개월 전, 위험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자리에서 베리 공작이 암살자의 칼에 비명횡사하고 만 것이다. 이제 카롤리나의 뱃속에 있는 유복자에게 부르봉 왕가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아들인가, 딸인가? 무사히 건강하게 태어날 것인가, 아니면 불운하게도 사산될 것인가?


그 날 밤, 카롤리나는 축하의 박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들 앙리[Henri]를 낳았다. 앙리는 왕당파들로부터 '기적의 아이(L'enfant du miracle)'이라 불렸으며, 그의 탄생을 주제로 수많은 찬시와 송가(頌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앙리가 태어난 지 얼마 뒤, 베리 공작의 또 다른 아들이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어느 조용한 산실에서 첫울음을 울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그 때까지 평생을 누군가의 정부라는 그늘 아래 살아왔고, 그래서 앞으로도 역사의 그늘 속에 묻히게 될 한 무용수였다.





일명 비르지니, 무대 위에서는 비르지니 르텔리에[Virginie Letellier]라는 예명을 썼던 그 무용수의 진짜 이름은 외제니 비르지니 오레이유[Eugénie Virginie Oreille]였다. 1795년 8월 8일 파리 오페라의 미용사 겸 분장사였던 장 오레이유[Jean Oreille]와 마리 루이즈 부르기뇽[Marie Louise Bourguignon] 부부의 딸로 태어난 비르지니는 15세가 되던 해 부모님이 일하던 파리 오페라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유복한 집안의 딸들이 굳이 혹독한 연습을 해 가며 다른 이들 앞에서 춤을 선보이고 돈을 벌어야 할 이유는 없었던 시대였다. 때문에 소수를 제외하면, 발레리나는 - 특히 뒤에서 군무를 추는 이름 모를 무용수들은 - 대개 가난한 서민 가정의 소녀들이 선택하는 직업이었고 그들에 대한 대우도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녀들이 남의 집 하녀나 세탁부가 되는 것보다는 나은 길을 찾거나,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 화려한 주연으로 발탁되거나, 부유한 '후원자'를 만나겠다는 기대를 품고 발레리나가 되었다. 비르지니가 어떤 이유로 발레리나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저 어릴 때부터 보아 온 파리 오페라의 무용수들이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직업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빛나는 검은 눈을 가진 미인이었던 비르지니에게는 곧 그녀를 지원해 줄 수 있는 후원자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그런 종류의 제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스트라 공작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프랑스 제국근위대 기병총감

1811년 중순, 비르지니는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 프랑스 제국근위대 기병총감 장바티스트 베시에르[Jean-Baptiste Bessieres] 원수를 만났다. 베시에르는 그녀와의 관계를 철저하게 은폐했고 비르지니 또한 자기 후원자의 정체를 비밀에 부쳤기에,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왜 만났는가에 대한 내용은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확실한 것은 원수가 비르지니를 위해 파리에 아파트를 하나 마련했으며 꽤 많은 금전적 지원을 해 주었다는 사실뿐이다.


1813년 5월 1일 베시에르 원수가 전사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끝났다. 비르지니의 입장은 조금 난처해졌다.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던 베시에르 부인이 서류함에서 비르지니의 편지들을 발견하는 바람에, 그녀가 베시에르의 애인이었다는 소문이 파리에 쫙 퍼져 버린 탓이었다. 비르지니는 베시에르가 사 주었던 집과 물건들을 조용히 처분하고 오페라의 발레리나들 사이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잊혀지는 듯 했던 비르지니의 이름이 다시 소문을 타고 떠돌게 된 것은 루이 18세가 프랑스의 왕좌를 되찾은 1814년의 일이었다. 그녀가 무대에 오르는 날이면 항상 최고급 마차 한 대가 극장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공연이 끝난 뒤 그녀를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워낙 비싸 보이는 마차였으므로 주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는데,  그는 놀랍게도 루이 18세의 조카,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Charles Ferdinand d'Artois, duc de Berry]이었다. 나폴레옹의 근위대장과 사귀던 여자가 이제 부르봉 왕가의 왕족과 사귀다니! 사교계의 부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 일에 관해 떠들어 댔다.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

비르지니는 잠시 발레리나 일을 그만두고 어디론가 몸을 숨겼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으리라. 1815년 3월 4일, 그녀는 베리 공작의 아들 샤를 루이[Charles Louis]를 낳았다. 사생아의 탄생과 그 아이를 보겠다며 시도때도 없이 애인을 찾아가는 베리 공작의 경솔한 행동은 루이 18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자녀가 없었던 루이 18세에게 있어 베리 공작은 그 아버지이자 루이 18세의 남동생인 샤를 필리프[Charles Philippe], 그리고 제 형인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Louis Antoine, duc d'Angoulême]에 이어 왕위계승서열 3위인 고위 왕족이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결혼도 하지 않고 사생아부터 두다니 무슨 추태란 말인가?


루이 18세는 비르지니에게 연금 6,000프랑씩을 지급할 테니 다시는 베리 공작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1816년 봄, 조카를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리아 카롤리나 왕녀와 서둘러 결혼시켰다. 하지만 비르지니와 베리 공작은 그 뒤로도 만남을 이어갔다. 심지어 공작부인 카롤리나의 귀에까지도 두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소문이 흘러들어올 정도였다. 이듬해 말, 비르지니가 주최할 예정인 호화로운 무도회에 드는 비용을 전부 베리 공작이 지불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루이 18세는 그녀에게 직접 위협적인 경고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일설에 의하면, 왕의 명령을 받은 신하가 비르지니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드무아젤, 만일 무도회를 예정대로 개최하신다면 곧 생트펠라지((Sainte-Pélagie, 여죄수들을 수감했던 파리의 감옥)에서 주무시게 될 겁니다.


무도회는 취소되었지만 왕의 경고는 비르지니를 조금 조용하게 만드는 데 그쳤다. 루이 18세는 조카를 이 발레리나 곁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왕이 아니라 한 보나파르티스트에 의해 끝났다.


베리 공작의 암살

1820년 2월 13일 저녁, 베리 공작 부부는 발레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그 날의 상연작 중 <꾀꼬리(Rossignol)> 와 <카마초의 결혼(Noces de Gamache)> 이라는 두 작품의 주연이 '비르지니 르텔리에'였기에 카롤리나는 남편이 왜 오늘 공연을 보러 왔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안 좋아 먼저 돌아가 봐야겠다며 공연이 끝나기 전 냉담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은 아내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하러 따라나섰다. 그런데 그가 아내를 마차에 태우고 문을 닫으려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갑자기 돌진해 온 괴한이 공작의 팔을 잡아채더니 순식간에 단검을 들어 그의 가슴을 찔렀다. 수행원들이 괴한을 제압하고 공작을 급히 극장 안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했지만, 치명상을 입은 그는 곧 숨을 거두었다. 무대의상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달려온 비르지니는 죽은 공작을 보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공작부인이 그 소리를 들을까 봐 당황한 수행원들이 비르지니를 밖으로 끌어냈다.  


베리 공작의 암살자는 극렬 보나파르티스트인 루이 피에르 루벨[Louis Pierre Louvel]이란 사람이었다. 왜 공작을 암살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에 돌아올 자격이 없고 [...] 따라서 그들의 대를 끊어 놓으려 했다"고 대답했다. '대를 끊는다'는 의미에서 베리 공작의 죽음은 왕당파들에게 분명 청천벽력같은 사건이었다. 자녀가 없는 루이 18세의 후계자는 그 조카들이었으나, 첫째 조카 앙굴렘 공작 부부 역시 자녀가 없었다. 때문에 이미 딸 한 명을 낳은 둘째 조카 베리 공작 부부에게 왕가의 희망이 걸려 있었다. 그 베리 공작이 결국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이제 왕가의 직계가 단절될 위기에 놓였다. 그런데 얼마 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공작부인 카롤리나와 정부 비르지니, 두 사람이 모두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임신 날짜를 따져 보면 두 아이는 베리 공작의 자식으로 추정되었다. 카롤리나가 아들을 낳는다면야 루이 18세와 왕당파들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겠지만, 뱃속에 든 아이의 건강상태와 성별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이 흘러갔다.


베리 공작부인,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1820년 9월 29일, 카롤리나가 먼저 아들을 낳았다. 왕실은 기쁨의 도가니가 되었다. 카롤리나의 아들 앙리가 '기적의 아이'라 불리며 만인의 축하를 받는 동안, 비르지니도 외로이 아들 페르디낭을 출산했다. 비르지니와 그녀의 두 아들은 왕실로부터 완전히 박대당하지는 않았고, 베리 공작이 그들 몫으로 남겨 준 약간의 유산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비르지니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비르지니는 몇 년 더 발레 무대에 오르다가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1843년, 비르지니가 왕실승전관장(directeur des messageries royales) 프랑수아 투샤르[François Touchard]와 결혼하여 이듬해 딸 폴린[Pauline]을 낳았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비르지니는 베리 공작의 정부이던 시절 알게 된 몇몇 상류층 인사들과 계속 인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늦은 나이에 새로 꾸린 가족과 함께 평화로이 여생을 보냈고, 1875년 10월 17일 80세를 일기로 파리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2003년, 프랑스 비쉬(Vichy)에 사는 은퇴한 노인 피에르 샬라멜 씨는 자신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 궁금증이 생겼다고 한다. 조부모님의 가계를 조사하기 시작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할머니 레오니 오레이유의 아버지는 1859년 이탈리아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받은 페르디낭 오레이유라는 장교였다. 그리고 이 페르디낭은 비르지니 오레이유와 베리 공작의 두 번째 사생아, '기적의 아이'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이복형과는 달리 영원히 아르투아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던 바로 그 아이였던 것이다. 어느 발레리나의 삶 이야기가 그녀의 고손자에 의해 비로소 그늘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었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도메인


참고자료

BOUCHER Jean Jacques, Charles Ferdinand d'Artois : duc de Berry, Ed. Ferdonand Lanore, 2000.

GILLET Jean-Claude, La part d'ombre des maréchaux de Napoléon, Giovanangeli, 2012.   

https://www.lamontagne.fr/vichy-03200/actualites/au-fil-de-ses-recherches-pierre-challamel-sest-decouvert-des-racines-dans-la-monarchie_1428575/#refresh (피에르 샬라멜 씨의 인터뷰)

https://fr.wikipedia.org/wiki/Assassinat_de_Charles-Ferdinand_d%27Art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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