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뜻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생애를 다룬 아동용 위인전에서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뜻이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로 '황야의 사자'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곤 했다. 부모님이 '코르시카의 독립을 위해 사자처럼 용맹하게 싸우라고 그런 이름을 붙였다' 같은 일화가 곁들여지는 것은 덤. 황야의 사자라니 왠지 나폴레옹과 잘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 그래서 어릴 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으나, 여러 외국어를 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이 이야기에 조금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레옹(-léon)은 사자와 관련 있는 단어가 맞는 듯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폴- 비슷한 발음을 가진 황야라는 단어는 도통 무엇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사실 아무리 그 단어를 찾으려 해 봤자 소용 없었을 것이다. 모든 외국 정보 수집의 기초라는 영문 위키백과를 봐도, 프랑스어로 구글링을 해 봐도, 나폴레옹에 대한 두꺼운 전기를 여러 권 읽어도, '나폴레옹'의 뜻이 '황야의 사자'라는 내용은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프랑스인들 또한 '나폴레옹'의 뜻이 프랑스어로 '황야의 사자'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가진 진짜 의미는 뭘까? 그리고 나폴레옹의 부모님은 왜 아들에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일까?
오늘날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름은 이름 자체의 의미를 떠나 100%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서 따 왔을 것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집권하기 전까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흔치 않았다. 나폴레옹이 어린 시절 브리엔 유년사관학교(École de Brienne)에 처음 입학했을 때, 급우들이 그의 특이한 이름을 듣고는 '라빠이오네(la paille au nez, 코에 붙은 지푸라기)'처럼 들린다며 놀려대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만 이름이 웃기게 들린 데는 나폴레옹의 강한 코르시카식 억양과 발음도 한몫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 이름을 처음으로 달고 다닌 사람은 아니다. 이탈리아어권 지역에서는 그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나폴레오네'라는 이름이 사용되어 왔다. 밀라노의 통치자였던 나폴레오네 델라 토레[Napoleone della Toree, c.1240-1278],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추기경[Napoleone Orsini, 1263-1342], 동명의 콘도티에로 나폴레오네 오르시니[Napoleone Orsini, 1420-1480] 등 우리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역사 속 인물들을 생각보다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이 이름은 서구권의 다른 몇몇 이름들이 그렇듯 성씨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아마 로마 태생의 조각가 카를로 안토니오 나폴리오니[Carlo Antonio Napolioni, 1675-1742]가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사용한 이름이라면 좋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조금 김 빠지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말하자면 '아무도 모른다' 이다. 그럼 이 글은 왜 쓰신거죠 우리는 그저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한 몇 가지 가설들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나폴레옹 재단에서 소개하는 유력한 가설들은 다음과 같다.
나폴리와 관련이 있다? '나폴레옹'은 나폴리(그리스어로 네아폴리스 Νεάπολις) 또는 나폴리+사자(그리스어로 레온 λέων)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이다. 혹은 네아폴리스라는 명칭 자체가 '신(네아)+도시(폴리스)'를 의미하기 때문에 '신도시'와 관련이 있는 이름일 수도 있다. 이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나폴리 - 아니면 어떤 새로운 도시 - 로부터 온 이방인이었을까?
사자는 사자인데 협곡의 사자다? '나폴레옹'은 그리스어로 협곡, 골짜기를 뜻하는 나포스/나페(νάπος/νάπη)와 사자를 뜻하는 레온이 합쳐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어쩌면 한국에 널리 퍼져 있는 황야의 사자 이야기의 근원은 이 협곡의 사자 설이 와전된 것일지도 모른다.
니벨룽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나폴레옹'은 게르만 전설 속의 니벨룽족이나 니벨룽 왕(Nibelung,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그 니벨룽족 맞다 -ㅅ-;;)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어원학적인 근거가 빈약할 뿐 아니라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난 뒤 등장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매우 낮다.
성 네오폴루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801년 나폴레옹과 교황청 사이에 정교협약(Concordat)이 체결되었을 때, 나폴레옹의 삼촌 조제프 페슈[Joseph Fesch] 추기경을 위시한 몇몇 성직자들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성인 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들은 이 성인, 네오폴루스[Neopolus]의 신실한 일생을 이야기했다 : 네오폴루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로마군 장교로 복무했으나 기독교를 믿고 주교가 되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Diocletianus]의 기독교 박해 당시 순교했다. 그리고 이 성인의 이름이 바로 '나폴레옹'의 어원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폴레옹이 가톨릭 교회와 화해하자마자 발견된 성인의 이름이 우연히도 '네오폴루스'이고 또 그의 직업이 우연히도 군인이라고? 게다가 성 네오폴루스의 축일은 8월 15일, 그러니까 나폴레옹의 생일과 같았다! 결국 이 수상한 성인은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교회의 성인 목록에서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성인들의 목록을 정리해 놓은 한 '성인 사전'에서는 이 성인에 관해 다음과 같은 해학적인 설명을 써 두었다 : "성 네아폴루스, 축일 8월 15일. 나폴레옹 황제의 뜻에 의해 탄생하셨고,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황제와 함께 임종하셨다."
그러면 나폴레옹의 부모님은 딱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 준 걸까? 뭐... 그럴 수도 있었다. 당시 -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 코르시카를 비롯한 서유럽 사회에서 이름이 갖는 뜻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집안에서 이름 몇 개를 돌려 쓰는 관행이 보편적이었고 대부나 대모, 조상님, 또는 존경할 만한 인물의 이름을 그냥 따 오는 경우도 많았다. 나폴레옹 전쟁기에 활약했던 군인 중 한 사람인 티에보 장군[Thiebault]의 이름은 '폴 샤를 프랑수아 아드리앙 앙리 디외도네'로 무려 6개나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이 길어진 이유를 아주 간략하게 설명한다.
(세례를 받을 때) 대부와 대모를 여럿 두는 것이 독일 지역의 풍습이었다. 내게는 여섯 분의 대부와 대모가 계셨다. [...] 나는 이분들의 이름을 각각 하나씩 받았다.
심지어 그의 이름 중 맨 앞에 있는 '폴[Paul]'은 라틴어로 '작은'이라는 뜻에서 유래했지만 당대 사람들 누구도 그 이름을 듣고 '작다'는 의미를 떠올리지 않았다. 사도 바울이라던지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처럼 그 이름을 가진 유명인을 생각한다면 모를까.
보나파르트 일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오네' 비슷한 이름이 이 집안에 들어온 것은 17세기 중엽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후 이 집안의 여러 남자들이 '나폴레오네'라는 이름을 썼다. 훗날의 황제 나폴레옹의 이름도 코르시카의 독립이라던가 사자처럼 싸우라 같은 무거운 의미를 품은 것이 아니라 그의 종조부 중 한 사람인 나풀리온(나풀리오네)[Napulion Buonaparte, 1717-1767]의 이름에서 따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위대한 동생과 구별되어 언제나 '조제프'로 불리는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 또한 풀네임은 조제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p.s. 한국에서 '황야의 사자' 설이 널리 퍼져 있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한국만큼 '황야의 사자'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 곳이 일본임을 생각해 보면 나폴레옹 이야기가 처음 일본을 거쳐 들어올 때 이 설도 같이 전파된 게 아닌가 싶다. 다만 필자의 일본어 실력이 썩 좋지 않고 현대 일본어가 아닌 근대 일본어는 더더욱 읽지 못하는 바, 이를 검증하지는 못할 것 같다 ;ㅅ;
참고자료
https://www.napoleon.org/histoire-des-2-empires/articles/prenom-napoleon/
https://en.wikipedia.org/wiki/Napoleone
티에보 장군 회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