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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설 Apr 03. 2023

정의를 정의라고 정의한 자의 정의는 누가 정의했는가.

이전에 한 작가님과 이야기하던 중 있었던 일이다. 잠시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우연히 객관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작가님은 객관화라는 단어 자체가 모순되었다는 말을 꺼냈다. 객관적이라는 인정을 위해서는 한 집단 내에서 보편성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 집단 자체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것이 첫 이유였다. 개인이 아닌 둘 이상이면 집단이 될 수 있고, 둘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난 것이 과연 객관적이냐고 말할 수 있느냐고, 그리고 혹여 객관적이라는 인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집단 내에서 그게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객관적일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객관적 지식은 거짓이 되고 주관적 주장이 진실이자 진리인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파문당했고, 조르다노 브루노는 화형 당했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의 사상을 강제로 죽인 체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틀린 것은 누구였지. 결국 절대적 진리는 없고, 보편적 사상이 객관적이라고 한들, 그것이 단순히 진리는 아니거니와 애초에 모두에게 합당한 보편적 사실이란 한 생명의 시작과 마지막 순간, 탄생과 죽음 단순히 그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작가님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은 우리 둘에게는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이지만 타인에게는 그저 주관적 의견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며, 어쩌면 타인에게는 그저 헛소리를 하는 몽상가들에 불과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이게 어쩌면 예술가들의 작품은 죽은 후에야 인정받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것마저도 인정하지만, 이 또한 누군가에게는 주관적 생각에 불과하다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이러한 형식의 대화를 나눴다.


가장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근래 읽은 책의 제목 중 가장 감명 깊은 것은 로랑스 타르디외의 '영원한 것은 없기에(원문: Puisque Rien Ne Dure)'였다. 영원한 것은 없다. 탄생의 기쁨과 찬란함도 영원하지 않고, 우리의 젊음도, 그리고 어쩌면 죽음마저도 영원할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죽어본 적이 없어 말할 수 없다.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 이 삶에서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평생이 지나도 바꿀 수 없으리라 믿었던 이름도 바꿀 수 있는 시대. 영원한 것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고 싶다.


정의를 정의라고 정의한 자의 정의는 누가 정의했는가. 어쩌면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진지하게 질문한다. 과연 최초로 정의를 정의한 자는 누구이며, 그것을 정의한 기준은 무엇인가? 진실이라 믿었던 것도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거짓이 진실일 수도 있다. 타인에게 객관적이라 보였던 행동도 또 다른 타인에게는 아닐지도 모른다. 정의를 정리할 수 없는 정신 없이 휘몰아치는 파도 위에 올라탄 듯한 기분을 느낀다. 결론적으로 이 세계에 보편화된 진실이란 없고, 거짓도 없으며, 그러니 객관적 사실, 명제도 없다. 무엇 하나 정해지지 않고 변화할 수 있다.


나는 단순히 이것을 말하고 싶었다. 결국 정해진 것은 없다. 진실이 없는데 진실을 찾고자 한다. 거짓이 없는데 해명하려 한다. 타인이 말하는 객관성은 어쩌면 타인의 주관성. 실존하는 자는 자유를 가진다. 자유를 가졌을 때우리는 비로소 실존한다. 기준의 설정은 자아의 확립이요, 진짜 자유일 터. 우리의 모든 문장이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죽은 단어의 비애를 애도하며, 살아남은 단어의 무운을 기원하며, 탄생할 단어의 실존을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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