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설 May 28. 2023

Burn Out, 열정적 무기력증.

실존의 의미.

아마 2022년 10월 18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전 주에 6번째 브런치 작가 지원을 신청했고, 합격 메일을 받았다. 2018년 글을 쓰고 1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목표했던 것이라 그런지, 이 합격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예술을 하는 이에게 있어 숫자는 그다지 절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내 작품이 가져온 영의 개수는 내 예술이 가진 영혼의 무게 정도는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회에서 결국 숫자는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니. 5,000원.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출간하고 번 돈. 아, 이전에 모닥불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한 독자님께 10,000원을 후원받았으니 15,000원. 2017년, 책을 출간할 때 사용했던 표지 비용 50,000원, 35,000원의 적자. 내 예술이 가진 영혼의 가치는 -35,000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실에 전혀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0이 하나인 것보다는 세 개인 것이 더 좋지 않겠냐며, 적어도 나에게 관심을 가졌던 누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했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그 행복도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문득,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생존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미상의 아름다운 이상에서 살던 나는  본질의 실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찾아온 두려움으로 오한을 느꼈다. 가끔은 나를 멍청하게 만드는 그 약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추위가 땅을 덮으니 눈이 내리고, 생명이 불타며 춤을 추던 우리는 얼어 죽다. 이게 아마 요즘 많은 이들이 말하는 번 아웃(Burn Out). 아니, 아무래도 이것은 번아웃보다는 무기력증에 가까울 듯하다. 여전히 나는 글을 좋아하고, 이 시간이 즐겁지만, 모순적이게도 글을 쓴다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열정은 있다, 그러나 무기력하다. 나는 이것을 열정적 무기력증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지금 시대는 참으로 힘든 시대가 맞다. 경쟁의 과열, 노력과 열정을 강요하며 우리는 강박적으로 이에 응한다. 휴식은 경쟁에서의 암묵적 패배를 의미한다. 과거, 현재, 미래, 우리는 유일하게 실존하는 현재를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희생한다.  2023년 5월 28일,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비가 내린다. 나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10초, 아니 5초, 아니 3초 후, 갑자기 천둥이 내리치며 건물이 무너져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예견은 그저 예상, 우리 그 누구도 1초 앞의 미래조차 알 수 없다.


이 현실이 만든 벽은 생각보다 더욱 견고하고 넓으며, 높았다. 이제야 조금은 피카소가 말했던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순수는 무지, 무지는 곧 현실에서의 도피이자 탈출. 세상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순수한 예술을. 이제야 알 것만 같다.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 취업을 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문학을 하는, 예술을 하는 내가 멋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고 두렵기만 한 상태.


브런치에 저장된 글만 10개가 넘는다. 전부 쓰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쌓인 흔적들이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글을 올리지 않았다. 브런치에 일정 기간 작품을 올리지 않으면 알림이 온다. 이제는 그 알림조차 오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이가 없다, 이제 정말 아무도 없다. 이런 생각이 나를 가득 채웠고, 정말 현실을 마주하고 이제는 그만해야 하나 싶을 때였다.


댓글이 달렸다는 알림이 떴다. 꽤 오래전에 올렸던 글에 달린 댓글이었다. 어떻게 그 글을 보시게 되었는지 경로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글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나의 모든 글에 장문의 댓글을 남겨주셨다. 사실, 오래전 모종의 사건으로 나의 계정에 여러 악플이 달렸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부터 댓글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탓도 있었고, 새벽 시간이었던 탓에 나는 먼저 잠을 자야겠다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또 다른 글 여러 개에 댓글이 달려있었다. 그분은 내 글에 대한 아쉬운 점과 좋았던 점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인지하고 있던 부분과 인지하지 못했던 점까지 전부. 이유 모를 감사함이 마음을 울렸다.


그 후에도 나의 작품 대부분에 댓글을 남겨주시며 좋은 글을 보여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겨주셨다. 그러나 감사는 내가 해야 한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이제는 다시 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글에 대한 열정이 조금은 다시 살아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 깊은 바다에 빠져 사라진 나의 파라다이스는 아틀란티스, 여전히 저 아래에서도 아름답게 빛난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몸을 감싼다. 여전히 나는 두렵고, 두렵다. 그럼에도 이것마저도 내가 여전히 살아있고 실존하고 있음을 증명하며, 내 실존의 의미이니 나는 펜을 잡은 손을 떨며 문장을 이어나간다. 나는 결국 어떻게든 글을 쓰며 살아갈 운명을 타고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이 사실이 행복하지만 두렵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또 이런 순간이 오겠지, 지금보다 더 큰 바람이 몸을 억누를 때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인생은 결과적으로 혼자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본질적 의미는 고독에서 탄생한다고. 그러나 이것은 아무래도 틀린 것만 같다. 인간은 결국 무엇도 할 수 없다, 이것이 파우스트의 진리. 그러니 우리는 모두 함께 해야 한다, 무엇 하나라도 해내기 위해. 인생은 혼자의 의미는 전체가 하나가 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같은 시야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찾아오기를.

작가의 이전글 딜러 없이 차량 구매가 과연 가능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