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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이 Jul 24. 2020

은행을 털지만 사랑은 해야겠어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 리뷰


낯설고 또 낯설다. 스페인 드라마라니. 자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도 넷플릭스는 옳았다. 그렇게 〈종이의 집〉은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다.





이것은 살바도르 달리 가면을 쓴 웬 미친놈 8명이 은행을 터는 이야기이다. 


물론 즉흥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모든 사건의 주모자 교수는 20년 전부터 신분증 갱신을 하지 않았고, 5년 전에 터널을 파놓는 등, 보통 머리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24억 유로 털이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철저한 수준의 준비를 해왔다.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다. 그냥 있는 돈을 꺼내오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 조폐국을 점거하고 아예 유로화를 찍어내는 아이디어였으니.


드라마의 초반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스페인 출신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가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루하던 한낮의 풍경이, 돌연 괴한이 총구를 들이밀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순식간에 조폐국의 직원들을 포함해 박물관 견학을 온 학생들까지 총 67명의 인질이 포섭된다.


이들은 강도들과 같은 빨간 점프슈트 착용을 강요받고, 모형 총을 들어 경찰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리고 소그룹으로 나뉘어 유로화를 인쇄하거나 터널을 파는 등 세부적인 일을 분담받게 된다.


인질 모두 빨간 옷에 가면까지 착용하니 상당히 위압적이고도 자극적인 모습이 연출되는데, 이 때문에 외부 사람들이 누가 누구인지 분별하기 곤란해졌을뿐더러 나중에는 인질들 간 사이에서도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또한, 조폐국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한 공간적인 압박과 함께, 통제로 인한 심리적인 분열이 어우러지며 인질이 아닌 인물 그 자체의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point 1. 다양한 인간 군상


총상을 치료하러 들어온 의사들을 향해 인질들이 겨누는 총구


이야기는 교수와 8인의 강도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 교수가 외부에서 계획을 관제하고 경찰과의 협상을 맡는 브레인의 역할이라면, 8인의 강도들은 조폐국에 침입하고 점거, 인질들을 통제하며 유로화를 생산하는 행동대원의 역할을 맡는다.


이들은 강도 사건이 있기 5개월 전에 교수에 의해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모두 분야별로 나름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놓여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다. 사실상 이 드라마의 진면목이 이 인물들의 입체성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왼쪽부터 오슬로, 헬싱키, 도쿄, 리우, 베를린, 나이로비, 교수, 모스크바, 덴버


언제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교수부터, 다혈질이지만 행동이 빠른 도쿄, 순박한 컴퓨터 천재 리우, 냉혈한 사이코패스 대장 베를린, 화폐 위조 전문가 나이로비, 머슬맨 담당 쌍둥이 오슬로헬싱키, 터널 전문가 모스크바와 열정적인 그의 아들 덴버까지.


이들은 애당초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를 도시 이름으로 부르며,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그렇게 그들은 5개월 간 마드리드 외곽의 한 버려진 별장에서 지내며 계획 실행에 돌입하게 된다.


조폐국 털이 계획의 총 지휘자, 교수


그러나 처음의 의기투합하던 모습과 달리, 막상 조폐국 안에 들어가고 보니 돌발상황이 난무하는 지경.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강도들이 체력적으로 지치고, 인질들은 말도 안 듣고, 교수와는 연락이 자주 끊기는 등, 미처 계획에는 없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두고 인물들은 격렬한 대립각을 이루게 된다.


공포심, 친밀감, 수치심을 넘나들며 인질을 통제하는 강도들


그리고 몇 년 간 이 계획을 구상하고 착수에 돌입한 교수와 8인의 강도들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 간의 사랑이었다. 아무리 돈을 목적으로 모였고 서로를 도시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 유대감이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기다가 그 공간이라는 게 다른 곳도 아니고 조폐국 아닌가. 가장 폐쇄적이고 그저 차갑기만 한 돌과 철의 공간에서, 사람의 온기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귀한 것이 되어버린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모니카를 극진히 치료해주는 덴버와 모스크바


드라마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인간관계가 등장한다. 극 중 인질 중의 한 명인 모니카는 조폐국장의 비서로, 그와의 내연 관계로 임신을 한 상황이다. 그런 그녀가 다치게 되자 덴버는 베를린 몰래 그녀를 숨겨주고 정성껏 치료를 해준다.


다른 인질들은 강도들이 모니카를 총살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공포심에 휩싸여 있다가,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되려 강도들의 약한 마음을 알고 우습게 보게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강도들이 보이는 호의를 이용해 실리를 취하고 탈출을 꾀하는 등 점점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흉악범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허접한 그들


조폐국 강도 사건은 128시간 만에 마무리되지만, 그 안에서 나타난 다양한 인간관계는 여러 형태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비롯해 동성, 자매, 형제, 부자, 부녀, 도둑과 인질, 도둑과 경찰, 상사와 부하직원까지. 사랑, 존경, 경쟁, 증오, 동정 등 인물들의 복합적인 감정이 어우러지는 것을 보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오슬로를 위해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헬싱키



point 2. 그 종이의 의미는


드라마의 원제는 'La Casa de Papel'로, 넷플릭스 한국어판에는 '종이(papel)의 집(casa)'이라는 의미 그대로 담겼다.


제목의 의미는 다분히 중의적인데, 첫 번째는 돈이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시즌 2의 말미에서는 교수가 "이건 그냥 종이일 뿐이야"라며 돈을 찢는 장면이 등장한다.


오프닝 신은 서정적인 음악과 더불어 아름다운 영상미를 자랑한다


두 번째는 조폐국 그 자체가 종이와도 같다는 뜻이다. 어쩌면 스페인에서 가장 삼엄한 보안을 갖추고, 겹겹의 철과 콘크리트로 쌓인 철옹성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허술하기 그지없다. 침입하기 쉽다는 뜻이 아니다. 그 외적 견고함이 역설적으로, 돈의 태생적 취약성을 감추고 있다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다.


혁명의 노래, 'Bella Ciao'를 부르는 교수와 베를린


사건 담당자인 리켈 경감과의 대화 중 유럽중앙은행이 찍어내는 유동성 현금을 비판하는 장면이나, 베를린과 혁명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통해 교수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오게 된다.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Bella Ciao'는 1940년대 이탈리아 저항군이 불렀던 노래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전장으로 떠나는 투사의 모습을 그리는 민중가요이다. 극 중 인물들이 직접 부르기도 하고, 시즌 2가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도 등장하는 노래라 그 의미가 크다.


추적되지 않는 유로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시장에 비정상적인 경로의 돈이 많이 풀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이의 집을 즐길 수 있는 두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았지만, 사실 이밖에도 다양한 매력이 있다. 인물 개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고, 스페인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 그리고 스페인어라는 새로운 언어에 완전히 몰입되는 경험 또한 색다를 것이다.


시즌 1, 2는 조폐국을 배경으로 하고, 시즌 3과 4는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앞선 시리즈의 감동을 이어갈 수 있을지 기대가 크다.



2020년 7월 24일




+ ) 넷플릭스 영어판에는 'Money Heist'라는 제목을 채택했던데, 할리우드 강도 영화 제목 같아 이 점이 매우 아쉽다. 기존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House of Cards'가 있어 중복되는 느낌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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