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추억
한국에 살 적에 우리 부부는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양양에 갔다. 우연한 기회에 한 번 방문했던 양양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양양의 좋은 점을 늘어놓자면 끝이 없을 거다. (성수기를 제외하면) 인파가 붐비지 않고, 바닷물이 맑으며, 하늘은 높고 푸르다. 양양에는 여느 강원도 마을처럼 바다뿐 아니라 산도 가까이에 있다. 산 타기를 좋아하는 남편에게 안성맞춤이다. 위아래로는 속초나 강릉 같은 멋진 도시가 있어서, 조용한 마을이 심심하다 싶으면 잠시 다녀오기도 좋다. 서울양양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이동루트와 시간이 단축된 것도 한 몫했다.
우리는 에어비앤비나 한 달 살기 카페에 올라온 숙소 중 한 곳을 골라 대개 일주일 단위로 숙소를 예약했다. 마당이 한 뼘이라도 있는 조용한 시골집을 주로 골랐고, 때로는 바닷가 근처의 지어진 지 오래된 아파트에 묵기도 했다. 그중에 한 집이 우리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인형의 집이다. 동화 속에 나오는 핑크빛 돌하우스는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고 포근했던 인형의 집.
그 숙소는 마을 입구에 위치한, 오래된 구옥을 리모델링 한 소박한 단층집이었다. 흔하지 않은 구조가 재미있었고, 오래된 집이 머금고 있는 매력적인 디테일들이 썩 마음에 들었다. 집 앞으로는 작은 앞마당이 있어서 텐트를 쳐놓고 아이들을 놀게 하기도 하고, 캠핑 테이블을 펴놓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오래된 집이 자주 그렇듯, 몇 가지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그중 하나가 주방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싱크대가 너무 낮았다. 안 그래도 이전에 살던 집의 주방을 설계할 때, 싱크대를 표준 사이즈보다 높게 제작해 달라고 특별 요청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남편은 한국의 주방을 이미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이곳의 주방은 유난히 더 낮았다. 전에 이곳에 사시던 분은 요정같이 아담하신 분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래도 뭐, 괜찮았다. 딱 일주일만 견디면 되는 일이고 간단한 요리만 해 먹을 작정이었으니까.
아무래도 허리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이곳에서 지내는 기간만큼은 내가 주방 일을 전적으로 담당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걸 미안해했고 어느 날 결국 설거지를 했다. 처음에는 서서 하다가 결국에는 무릎을 꿇고서.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빵 터졌다. 이 집이 인형의 집 같기도 하고, 저 사람이 거인 같기도 해서.
이러나저러나 몸 상할 자세였다. 서 있으면 허리에 무리가 가고 무릎을 꿇으면 무릎팍이 상할 것이고… 한바탕 웃고 난 뒤 남편을 말렸다.
“여보, 고마워. 당신 마음 잘 알겠어. 근데 진짜 이건 아닌 거 같아. 내가 할게. 이러다 몸 상해.”
양양에는 우리 가족의 행복한 순간이 가득하다. 푸른 하늘과 바다, 모래 놀이에 열중하던 아이들, 장 서는 날의 풍경, 싱싱한 바지락을 넣어 만든 칼국수, 맛있는 빵집, 서핑 수업, 이른 새벽부터 목놓아 울던 동네 수탉 그리고 인형의 집...
해외 살이를 하는 터에 쉬이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 양양. 대형 리조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리는 걸 보니 아마 그 지역 지형이나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무언갈 놓치고 있는 기분이다. 언젠가 양양을 다시 찾으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혹시라도 변해버린 모습에 실망하지는 않을까? 바닷물은 점점 더러워지고, 정겨운 옛날집은 커다란 건물에 자리를 내주는 암울한 미래만이 그려져서 씁쓸하다. 이것은 기우일까. 기우였으면 좋겠다.